[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미국 내 당파적 대립 속에서도 여야 유권자 상당수가 약가, 보육비, 신용카드 이자율 등에 대한 정부의 가격 통제와 시장 개입을 광범위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전통적인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적 틀을 벗어난 포퓰리즘 정책이 미 정치권의 새로운 주류 이념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9일(현지시간)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민주당 측 여론조사전문가 존 앤잘론, 공화당 측 애덤 겔러와 공동으로 지난 16~21일 등록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오차범위 ±2.5%포인트[p])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공화·민주 양당 모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황 속에서도 정당의 틀을 뛰어넘는 초당적 정책 공감대가 명확히 확인됐다.
이번 조사에서 유권자 대다수는 강력한 국경 안보 강화 조치(공화 98%·민주 98%·무당파 77%)와 불법 체류자에 대한 시민권 부여 길(민주 97%·공화 54%·무당파 69%)을 동시에 지지했다.
또한 민주당 지지층의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48%)가 오직 미국 시민권자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투표 시 신분증 제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공화당(97%) 및 무당파(71%) 유권자들의 입장에 동의했다.
중간선거 공약과 의회 논쟁 주제를 바탕으로 30여 개 주요 정책에 대해 실시된 이번 조사에서, 유권자들은 특히 생활비 부담 완화를 위한 각종 시장 개입 조치에 여야를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신용카드 이자율을 연 10%로 제한하는 방안이다. 전체 응답자의 약 80%가 이에 찬성했다. 이는 진보 성향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무소속·버몬트)과 의회 내 대표적 보수파인 조시 홀리 상원의원(공화·미주리)이 공동 발의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지지를 표명한 대표적 초당파 포퓰리즘 공약이다.
유권자의 거의 4분의 3이 근로 가정의 보육비 부담 상한제 도입을 지지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민주·매사추세츠)과 같은 진보 성향의 민주당 의원들이 지지하는 방안이다.
또한, 유권자의 거의 4분의 3은 정부 주도의 의약품 할인 안내 웹사이트 개설을 지지했는데,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트럼프RX'란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공화당 유권자(75%) 뿐 아니라 민주당 유권자(76%)도 지지하고 있단 점이다.
이 외에도 대규모 기관투자자의 주택 대량 매입을 제한하는 법안(찬성 75%) 등 주거 및 생활비 경감 관련 16개 정책 중 14개 항목이 과반의 찬성을 얻었다.
설문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얻은 정책 아이디어 중 상당수는 부유층, 건강 보험 회사 또는 기타 기업과 같은 기득권층보다 소비자나 일반 시민을 우대하는 포퓰리즘 성향을 띠었다.
민주당 여론조사 전문가 존 앤잘론은 "우리는 세상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제는 포퓰리즘이 양당 모두에서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공화당 측 전문가 애덤 겔러 역시 "유권자가 지지한 모든 인기 항목의 공통점은 '유권자와 공정한 가격 사이를 막아서는 대형 기관'이 존재한다는 점"이라며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성에 관한 문제"라고 짚었다.
이 같은 유권자들의 기류 변화는 고물가·고금리 장기화와 주거비 급등으로 기존의 자유시장 중심 경제 체제가 생활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불신이 누적된 결과로 풀이된다.
중도우파 성향의 싱크탱크인 미 기업연구소(AEI) 마이클 스트레인 이코노미스트는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그리고 팬데믹 이후의 인플레이션을 거치며 정책 논의가 "과거 정치 지도자들이 논의했던 일반적인 범주에서 매우 벗어난" 아이디어로까지 확대됐다고 진단했다.
이는 일부 공화당 인사들마저 전통적으로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선호해 온 '정부 개입'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변화다. 스트레인 이코노미스트는 "보수주의자들이 시장 논리를 지켜야 한다는 절제심을 잃게 되면, 결국 진보 성향 민주당원들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 다수당을 유지할 경우 성인 1인당 5,000달러(약 680만 원)씩 지급하겠다고 내건 공약은 지지율은 23%에 그쳐 조사 대상 중 가장 낮았다. 민주사회주의(DSA) 성향의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이 제안한 '정부 운영 할인 식료품점' 구상 역시 찬성표가 37%에 머물렀다.
부유세 인상안의 경우 73%가 연소득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과세 강화에 찬성했으나, 공화당 지지층 내에서는 과반이 반대해 당파 간 온도 차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경제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한 미 정치권 내에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정부 개입형' 포퓰리즘 정책의 입지 강화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wonjc6@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