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여의도 증권가의 리서치센터장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당시 코스피지수는 2000포인트를 웃돌던 때였다.
그는 "저성장의 시대입니다. 자산에 낀 거품이 걷힐 것입니다. 이제는 자산가치가 상승하거나 유지되는 것에 대한 적응보다는 자산가격이 꺼지는 것에 대한 적응도 필요합니다."라며 자산가치 하락을 점쳤다. 그가 꼽은 요인은 대략 3가지로 압축된다.
무엇보다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한 뒤 그 후대들이 부동산 가격을 떠받쳐 줄만한 소득 여건이 안되는 것. 또 하나는 우리의 수출시장인 중국경제가 두자릿수 성장률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았듯이 글로벌 톱수준인 자동차 휴대폰 반도체 조선 등에서 중국에게 따라잡힐 수 있다는 시나리오에 근거한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부동산이 하락하면서 '하우스푸어'가 양산되고 가계부채 규모는 1000조원을 넘어섰다. 주택담보 대출로 부동산을 구입했던 수많은 월급쟁이 투자자들은 대출이자 갚기에 지쳐 그동안 용돈벌이 하던 주식투자마저 접고 있다. 그간 수수료 이익으로 적잖은 수익을 내던 증권사들은 거래량이 줄면서 불황의 터널 한복판에 서 있다. 여의도 증권가에 구조조정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장기불황에 대처하기 위한 '일본불황 스터디'가 한창인 것도 그 이유다.
그 센터장의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한국경제는 이미 저성장의 터널 속에 와 있다. 실제 지난 3분기 우리 경제 성장률이 1.6% 성장하는데 그쳤다. 금융위기 이후 3년 만에 최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수출전선에도 비상이다. 삼성전자 현대차가 글로벌시장을 무대로 그나마 선방하고 있을 뿐이지 상당수 기업들은 불확실한 내년을 대비해 현금확보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세계 1위의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받았을 정도다.
이쯤되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줄이고 보자는 심리는 어쩌면 당연하다. 투자규모를 줄이니 성장률이 내려가고 일자리가 줄어드는 악순환의 서곡이 울리는 셈이다.
한국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기업인들이 움추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유력 대선 후보들은 연일 '경제민주화'를 합창하고 있다. 각 캠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제민주화'만이 우리 사회 양극화의 해법인 양 재벌과 대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창조경제, 공정경제, 혁신경제 등 구호만 요란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작 양질의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국익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이 없다. 성장동력을 찾기보다는 성장동력의 핵심인 기업인들의 기를 꺾어놓기에 여념이 없다. 경제민주화에 앞서 꺼져가는 성장엔진을 다시 복원시킬 대안제시가 우선이다.
지난 3/4분기에 상장사 절반가량이 '어닝쇼크'의 성적표를 냈다고 한다. 4/4분기에도 더 나아질 요인이 별로없다. 한국 경제가 경기침체를 넘어 '장기 불황'의 늪을 건너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직면해 있다는 얘기다. 대선후보들의 표심 겨냥용 '경제민주화'에 휘둘리다가는 한국경제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대선후보들도 침묵하는 다수가 경제민주화에 무한정 지지한다고 보면 오산이다. 예전처럼 유권자들의 눈높이와 식견을 얕잡아봐서는 결코 대통령 자리에 앉을 수 없을 듯 싶다.
한 기업에 근무하는 지인의 말이다. "그들 말대로 경제민주화가 됐는데 정작 우리 아들, 딸들이 취직할 대기업이 망가지고, 문을 닫을 판이라면 지지하겠나."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으로 향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저성장의 한계를 극복할 묘안을 짜 내야 할 시기이지, '경제민주화'로 기운을 소진할 때가 아니다.
산업부장 이규석 newspim2006@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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