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노종빈 기자] 과거 1990년대 장기불황의 터널을 겪은 바 있는 일본이 디플레이션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유럽도 저성장 저투자 소비위축 경기둔화 등으로 초래되는 디플레이션을 떨쳐내기 위한 정책적 승부수를 고민하고 있지만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일본은행(BOJ)이 디플레이션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나서면서 일본 엔화가 추가로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에 따라 일본기업들과 경쟁하는 한국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위협받을 수 있는 우려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 물가하락 속 장기불황, 디플레이션의 악몽
오랜 기간에 걸쳐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저물가에 따른 저투자와 소비위축을 가져와 자칫 장기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지난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불황이 디플레이션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됐다.
BOJ는 지난달 31일 내놓은 본원통화 증대 목표를 60~70조엔으로 확대했다. 디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무슨 조치든 다 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결정을 유지한 지난 19일 BOJ 정책회의 결과 시장 전문가들은 시기의 문제일 뿐 BOJ가 향후에도 추가부양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관측한다.
BOJ 양적완화 확대 결정 이후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달러/엔 환율은 지난주 달러당 118.98엔까지 급격히 오른 것을 비롯, 언제든 120엔대를 넘어설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8일 내년 10월 예정된 소비세율 인상을 연기한다는 명목하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내달 14일 조기 총선 실시를 선언하는 등 정치권과 금융시장 안팎에 커다란 혼란이 유발된 상황이다.
아베 총리의 주된 소비세 인상 연기 근거는 일본의 지난 3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연율기준 2.2% 증가를 기대했으나 예상을 뒤엎고 전기 대비 1.6%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BOJ 통화정책회의 의사록에서도 위원들은 추가적인 양적완화를 통해 디플레이션을 잡기위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루야마 슌 BNP파리바 수석 일본 주식 전략가는 "소비자들과 기업들이 그동안의 통화 정책으로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며 "이 때문에 "BOJ는 시장은 물론 경제 전반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내놓았다"고 말했다.
(자료:산업통상자원부) (그래픽=송유미 미술기자) |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도 25일 기자회견에서 디플레이션(물가하락) 탈피를 위해 추가 금융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구로다 총재는 2% 물가상승 목표를 조기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특히 지난 4월 소비세 인상 효과를 제외할 경우 지난 9월 핵심인플레이션은 1%에 불과해 최근 1년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소비세 인상을 내년으로 연기하게 되면 경기 부양에는 도움이 될수 있으나 일본의 재정적자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워진다"며 "일본 정부가 구체적이고 신뢰할만한 장기적인 재정 건전화 정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BOJ의 내년 2%대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의 가장 큰 불안 요인은 국제유가다. 최근 20% 이상 급락한 국제유가 변수로 인해 이 같은 정책 목표를 과연 실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국제유가가 현 수준을 유지할 경우 인플레이션은 내년 상반기까지 하방압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구라모치 노부히코 미즈호증권 전략가는 "정책위원들은 내년 4월까지 물가상승률 1%대 미만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을 위한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자연스럽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 중국도 금리인하 선회…디플레 억제
중국도 지난 23일 인민은행이 2년여 만에 금리를 인하하면서 성장 부진에서 탈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날 인민은행은 1년 만기 대출 기준금리를 0.4%p(포인트) 내린 5.6%로, 1년 만기 예금 기준금리를 0.25%p 낮춘 2.75%로 각각 인하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갑작스럽게 금리를 내리면서 글로벌 환율전쟁에 동참한 것으로 분석했지만 이보다는 자국내 경기부양을 통한 디플레이션 억제 쪽으로 직접적인 방향을 설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중국 내 경기 상황이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의미다. 중국의 지난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7.3%에 그쳤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7년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7%대 성장을 기록한 중국의 지난 10월 인플레이션은 전년 대비 1.6% 상승했는데 이 상승폭은 5년 만에 최저치다.
시장 관계자들은 중국의 추가적인 금리인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최근 현지 보도에 따르면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중국 경제가 '금리인하 사이클'에 진입할 것이며 당국도 물가 하락폭이 깊어지고 투자와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있다고 판단, 경기 부양 정책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관측했다.
중국 국영 싱크탱크의 한 전문가는 "중국 정책 당국자들의 노선이 변경됐다"며 "인민은행이 경기부양 정책과 기준금리 인하, 지급준비율 인하 등의 효과적인 정책도구들을 사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유럽發 디플레, 전 세계적 파장 가져올 것
최근 글로벌 경제 상황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인은 유럽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이다.
경제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유로존은 6년내 3번째 경기침체로 빠져들기 직전"이라며 "특히 유럽 최대 경제대국의 독일의 성장도 둔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1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이달 초 유로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어떤 정책이든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로존 인플레이션은 연율기준 0.4% 수준을 기록 목표치인 2%에 크게 모자란 상태다. 유로존 GDP 역시 지난 분기에 0.2% 성장하는데 그쳤다.
유럽내 각국은 채권금리가 이미 제로에 가까운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ECB로서도 추가적인 금리인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일한 실탄은 양적완화를 통한 자금 공급과 화폐발행 확대 뿐이다.
하지만 유럽 각국의 경제구조 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금을 쏟아부을 경우 더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 유럽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미국과 일본, 중국을 거쳐 지구촌 각국경제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올 전망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집행부와 통화당국자들이 디플레이션 해소에 충분한 확신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과연 이 문제를 통제할만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면서 각국은 극우성향이나 EU(유럽연합) 탈퇴 등을 주장하는 포퓰리즘 정당의 지지율이 높아지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직접적인 유동성 지원보다는 유럽 전역에 요청되고 있는 사회간접자본 투자 활성화를 통해 투자확대와 일자리 창출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뉴스핌 Newspim] 노종빈 기자 (unti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