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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峨山) 100주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 '정주영' 대한민국 역사가 되다

기사등록 : 2015-11-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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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70원 들고 가출해 대기업 '현대' 일궈..해외시장 진출도 앞장서

[편집자]한국경제의 거목 아산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탄생한지 25일로 100주년을 맞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 추진력 등을 바탕으로 한국경제의 신화가 된 현대그룹을 일궈냈다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KCC 등 정 회장의 땀이 서린 기업들은 지금도 한국경제의 중심축으로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 정 회장은 지금 이 땅에 없지만, 경기침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현실에서 그의 삶과 정신은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정주영 명예회장 100주년을 기념하며, 우리경제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본다. 

[뉴스핌=김신정 기자] '대한민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재계의 나폴레옹', '위기의 승부사, 세기의 도전자'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소년시절  단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맨손으로 세계 굴지의 '현대'를 일궈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청년 정주영>  사진제공=현대아산나눔재단

정 명예회장은 쌀집 막노동꾼으로 장사를 시작했고, 거래처에서 얻은 신뢰와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자동차, 조선, 건설업에 진출해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마련한 거목으로 평가된다. 

◆ 맨손으로 시작한 산골소년, 쌀가게서 사업가로 첫발

정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년 정주영은 쪼들리는 살림으로 10살 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늘 배가 고팠다. 또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사범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보통학교만 졸업한 채 무작정 가출을 시도한다.

두 차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에 붙들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정주영은 세번째 가출에 성공한 뒤 19세부터 인천에서 부두 하역일과 막노동을 했다.

이곳 저곳에서 막일꾼으로 일한 그는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해 쌀 한 가마니 값의 월급을 받고 세끼 식사는 그 집에서 먹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일한 지 3년쯤 되던 해, 가게 문을 닫겠다는 주인이 정 명예회장에게 가게를 꾸려갈 것을 제의하고, 정 명예회장은 곧 쌀가게 주인이 된다. 그 후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여상과 배화여고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돈을 조금씩 벌었다.

그러나 1939년 일제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 배급제 실시로 경일상회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이 때 쌀가게 단골이자 서울 최대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던 이을학씨를 만나게 되면서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청년 정주영> 사진제공=현대아산나눔재단

그 후 정 명예회장은 '아도서비스'라는 정비업체 사장이 된다. 하지만 아도서비스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장은 화재로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으로 거리에 내몰리게 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946년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이때 '현대'라는 상호를 처음 사용했다.

어느 날 정 명예회장은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공사대금으로 뭉칫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이거다 싶어 '현대토건사'라는 건설사를 세우게 된다. 이 회사가 지금 현대건설의 전신이 된다.

그는 한국전쟁 때 미군 숙소를 짓는 일에 손을 대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1962년 현대건설은 국내 도급순위 1위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 해외서 쌓아올린 모험과 열정

"위험을 피하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도태되는 길이다"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려는 정주영이 자신을 만류하려던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한 말이다.

정 명예회장은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진출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1966년 베트남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로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많은 수익을 내진 못했다. 미국의 월남정책이 바뀌었고 1973년 1월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그동안 월남에 진출해 공을 들여던 한국 기업 대부분이 낙담했지만 국제 기준에 맞는 공사를 할 수 있었던 정 명예회장은 이 순간에도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도전에는 수업료가 필요한 법이다".
 

<사진설명> 1976년 6월 고 정주영(왼쪽)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와프 왕자와 주바일 산업항 공사 계약을 체결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아산나눔재단
그는 조선업으로 눈을 돌려 사업 계획서 1장과 울산 미포 백사장 사진 1장만 들고 1971년 9월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는 여기서 우여곡절 끝에 돈을 빌리고 조선소도 없이 26만톤짜리 배 2척을 수주하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어 1976년 9억3000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 진출을 알렸다. 중동 건설 시장 진출은 그의 모험 정신 없이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문화와 종교, 언어면에서 가장 생소한 지역인데다 열사와 사막기후는 우리가 일해본 적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은 이런 상황에서 현장 노동자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다. 물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차로 길어오면 되고, 낮이 뜨겁다고 하는데 시원한 밤에 일하면 된다. 외화를 벌어들일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의 해외무대는 중동에 그치지 않았다. 인도네이사,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와 알래스카 기슭까지 사업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사진설명>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자동차 포니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아산나눔재단

1966년부터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순수 국산자동차 1호인 '포니'를 만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고, 198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엑셀이 미국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정 명예회장은 세계 도처에 있는 현장을 수시로 누볐다. 건설사업 해외진출로 외환위기 직전에 처했던 국가 재정을 구했고 조선, 자동차와 함께 현대를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올려놓게 됐다.

◆ 대권도전과 대북사업, 그리고 '형제의 난' 촉발

이렇게 한국 경제사의 살아있는 신화로 추대받던 정 명예회장은 1992년 '경제살리기'와 '통일경제'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의 도전은 대기업 총수의 첫 정치참여로, 세력다툼이 만발했던 정치현실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사진설명> 1998년 정주영 명예회장은 85세 고령에 소떼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사진제공=현대아산나눔재단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정 명예회장의 '통일경제론'과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맞아떨어지면서 남북경협 시대가 본격 시작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1998년 6월17일 85세 고령에 소떼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소떼 방북 3개월 뒤 '현대 금강호'가 출항했고, 현대의 대북사업이 본격화됐다. 대북사업은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고, 3년 뒤인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평생의 과업인 대북사업은 그룹에 위기를 몰고왔다. 수익성 없는 대북사업에 대한 '과다출혈'이 그룹의 부실을 심화시킨 것이다. 1999년 말 정 명예회장의 건강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는 그룹의 해체도 가속화됐다.

그로부터 2년도 채 안된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은 역사에 기록될 수많은 업적과 어록을 남기고,  86세로 생을 마감했다.



[뉴스핌 Newspim] 김신정 기자(aza@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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