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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Newspim] 김양섭 기자 (ssup825@newspim.com)
"오픈된 것(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종목)만 1200억원 정도 될 것 같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웃음)"
1200억원. 전업투자자인 박영옥(스마트인컴 대표)씨가 오로지 주식투자로만 일궈낸 자산이다. 공개되지 않은 자산을 더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는 주식을 농사에 비유한다. 농부가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선택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주식도 투자할 기업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그리고 파종한 후에는 늘 논에 나가 작물들을 살피는 것처럼 투자한 회사와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식투자 철학이다. 그는 투자기간을 적어도 3~5년 정도 잡는다. 어떤 종목은 10년 넘게 보유하기도 하다. 그는 “장기투자만이 답이다”고 강조한다. 직장인들에게도 주식투자를 하라고 권유하다. 기업들의 성장 과실을 공유해야 한다는 차원에서다. ‘매매’라는 표현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매매로 접근하면 아무리 벌어봐야 10억원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1000억원 이상의 주식을 갖고 있다. 시작은 4500만원에 불과했다.
박영옥 스마트인컴 대표 <사진=김양섭 기자> |
◆ 신문 팔던 소년, 1천억 주식 갑부 되다
박 대표는 전라북도 덕유산 자락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닌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 대표가 여섯 살 때 병석에 누워 2년여 병치레 끝에 돌아가셨다. 이후 가세는 급속히 기울었다.
요즘 흔히 말하는 ‘흙수저’집안이다. 장남인 그의 어깨는 무거웠다. 지게를 지고 3km 넘는 거리를 걸어 땔감을 해와야 했고, 방학 때는 광산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긴 했지만 중학교 입학조차 고민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하고, 첫 등록금을 대신 내주기로 하고서야 그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선 3년여 섬유가공 공장에서 일을 했고, 이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문을 팔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그 같은 상황을 원망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면서 지게를 진 것은 아니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나의 가장 강력한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신문을 팔면서 '영업'의 묘미를 몸으로 체득했다. 공장에서 일할 때보다 더 적은 시간을 일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벌었기 때문이다. 남는 시간에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신문을 팔면서 영업성과에 따라 수익에 차이가 난다는 사실, 장사를 잘하면 월급쟁이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 때 몸으로 느꼈단다. 장사를 잘 하는 기업에 투자해 성과를 공유한다는 그의 주식투자 철학이 이때부터 자리잡은 게 아닌가 싶다.
대학은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중앙대학교 경영학부에 입학해 4년간 장학금을 받았고, 월 10만원씩 보조금도 받았다.
"한 달 동안 입에서 단내 나도록 일해야 겨우 12만원 받았는데, 공짜로 배우면서 용돈 10만원까지 받는 세상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공짜'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회가 주는 돈이었고, 이를 계기로 사회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의 증권가 입문은 지도교수 추천 영향이 컸다. 증권분석사 시험에 도전해보라는 조언으로 대학교 4학년 때 시험을 쳐 합격했다. 학생 신분으로 1987년 현대투자연구소에 취업했다. 이듬해 대신증권에 입사했다. 증권사 입사를 결정하면서 그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증권사에서 4~5년 근무를 한 뒤 자문사에서 펀드매니저를 하고 이후 자신만의 고유펀드를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증권가에 입문한 그는 승승장구했다. 자문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옮겨 일하다가 교보증권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1997년에는 38세에 압구정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때는 바야흐로 1997년 9월. 외환위기(IMF) 촉발 직전이다.
지점장으로 일하던 시절 IMF가 터졌다. 본인 계좌는 물론 고객의 돈이 반의 반토막이 났다. 어머니 명의로 되어있는 집을 팔아 고객의 손실을 보전해줘야 했다. 법적인 책임은 없었지만 도의적 책임은 있었다.
“도저히 못견디겠더라. 내가 나중에 잘되더라도 두고두고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지독한 실패를 경험하게 됐던 순간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천만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때 실패가 없었다면 오늘날 성공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신봉했던 기술적 지표들은 일부 유용하긴 하지만 주가와 거래량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원리를 당시 터득했다”
IMF를 계기로 그는 투자패턴을 완전히 바꿨다. 장기투자자로 돌아섰다. 이때 그의 수중에는 4500만원이 전부였다. 농부의 마음으로. 좋은 기업을 찾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기업이 가진 땅을 보려고 현장에 가보고, 근처 부동산 중개업소도 다녀봤다. 회사 관계자들을 만나러 수차례 회사를 방문했다. 그 회사 분위기를 두루 살피기 위해 화장실도 가보고 식당도 가봤다. 그렇게 해서 확신이 서야만 ‘동업’의 마음으로 투자에 나섰다.
◆ '9.11테러' 전업투자자 계기.."기회는 기다리면 온다"
9.11 사태는 그에게 기회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외부 악재였다. 그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했다.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그의 자산은 10억원 정도. 그는 “확실한 기회로 생각했다. 그동안 좋게 보던 주식들이 다 급락했는데 그런 주식들을 사놓고 잠수를 탔다”고 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전업투자로 나선 것이다. 당시 그는 삼성증권에서 투자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9.11 사태는 그가 본격적으로 제도권에서 벗어나 전업투자자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는 그동안 봐왔던 좋은 종목을 몇 개 골라 풀베팅했다. 주변에서 돈을 빌려와 투자금을 더 높이기도 했다. 그는 “평온한 시기에 그런 베팅을 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고 답했다. 총 30억원 정도를 주식에 투자하고 기다렸다. 6개월여만에 그가 산 종목들은 대부분 이전 시세를 회복했다.
그는 항상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그는 “기다리면 기회는 언젠가 온다. 준비해온 사람만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8년 금융위기, 2013년 유럽재정 위기 등도 그에겐 모두 찬스였다.
그는 지수 전망을 잘 하지 않는다. 누가 코스피 지수 전망을 물어본다면 그의 대답은 “모른다”이다. 또 그가 투자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코스피 지수는 전체적인 주시시장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뿐 당신이 투자한 기업의 상황은 아니다. 거기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주식? “이미 수억원대 주식 보유”
그는 주식을 오래 보유한다. 기본적으로 3~5년 정도를 보고 투자를 시작한다. 기업을 발굴한 뒤 소량을 투자하고 공부와 소통을 계속한다. 확신이 서면 본격적인 투자를 한다. 매수기간은 짧아도 6개월, 길면 1년을 넘긴다. 이렇게 해서 어떤 주식은 3~5년 기다렸다 팔지만 일부 종목은 10년 넘게 보유하기도 한다. 그가 말한 ‘동업’이다.
그는 주로 대기업보다는 중소, 중견 기업 투자를 선호한다. 그리고 그 업종의 1등 기업을 좋아한다.
“내가 동업을 하는 마음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대기업들은 여러가지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경영자와 소통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기업 말고도 다양한 업종들의 1등 기업이 너무 많다. 자기 주변에서 알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 모르는 기업에 절대 투자하지 말아라.”
그는 자식들에게 이미 9년전 1600만~2500만원정도씩 증여를 했다. 주식투자 종잣돈 성격이다. 대학생인 두 딸의 자산은 그사이 무려 8억원, 12억원대로 늘어났다. 막내 아들의 자산은 3억원대다. 그는 1000만~2000만원이 얼마 안되는 것 같지만 스노우볼(Snowball)효과가 발휘되면 자산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녀들 각자 특성에 맞는 종목을 골라주려고 노력한다.
“큰 딸은 마케팅, 비즈니스, 여행 등에 관심이 많고, 둘째딸은 심리학 전공하는데 사람들의 심리 파악을 잘 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막내는 자동차나 장난감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다”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큰 딸에게 ‘진도’주식을 사줬는데, 큰딸의 의견을 듣고 금방 팔았다. 내 기준에는 좋은 기업이지만 딸의 기준으로는 아닌 듯 해서 그렇게 했다”
박 대표는 안랩에 투자해서 3년만에 250%의 수익률을 거둔 경험이 있다. 둘째 딸 이름으로도 이 기업에 투자했다. 박 대표는 1만4000~1만5000원대에 매수해서 4만원 내외에서 팔았다. 결과적으로 250% 정도의 수익을 보고 팔았지만 이후 대선테마가 붙으면서 폭등해 16만원대까지 올랐다. 4만원대에 매도 당시 박 대표가 ‘매도’의견을 냈지만 둘째 딸은 ‘보유’의견을 냈었다.
그렇다면 안랩을 4만원대에 매도한 것은 성공한 투자일까, 실패한 투자일까.
그는 "성공한 투자"라고 했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수익만 보자'라는 게 그의 투자철학이기도 하다. 투자할 당시 그는 안랩의 주식은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을만큼 좋은 주식었다고 회고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꾸준히 성장할 기업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테마주로 엮이는 순간 오히려 그는 매도했다.
"기업의 가치와 무관한 재료로 요동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럴 때는 팔고 나오는 것이 내 투자원칙 중 하나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주식이 또 있느냐’고 묻자 그는 뜬금없이 결혼식 주례를 봤던 얘기를 꺼냈다.
“인생 살아보니 자전거와 같더라. 결혼이란 2인용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결혼했다고 바로 행복해지는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투자한 기업중에 ‘삼천리자전거’라는 주식이 있는데 그런 의미로 삼천리자전거 주식 10주씩 실물로 결혼하는 신랑, 신부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물려주고 싶은 주식에 대한 구체적인 종목 대신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치를 줄 수 있는 기업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영옥 스마트인컴 대표 프로필
1961년 출생
1988년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2년 중앙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 석사
1987년 교보증권 지점장
2007년~2014년 새누리당 중앙위 금융·재정분과위원장
2006년~현재 스마트인컴 대표이사 회장
2013년~현재 중앙대학교 산업창업경영대학원 겸임교수
2013년~현재 김창준 정경아카데미 발전위원회 회장
2015년~현재 통일과나눔재단 후원회 '통나무' 공동대표
[뉴스핌 Newspim] 김양섭 기자 (ssup825@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