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이영태 선임기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9일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한국에 ‘북핵’ 공조에 적극 협력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청구서를 보냈다.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비용은 물론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과 종료까지 거론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트럼프는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벌어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에게선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그 나라 역사와 국민의 존엄을 고려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는 외교적 수사(修辭)와 배려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치밀한 계산과 실리를 추구한다.
취임 전에는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통화, 1972년 리차드 닉슨 대통령 이래 미국이 보장해온 ‘하나의 중국’ 원칙을 흔들었다. 지난 2월에는 중국을 ‘환율조작의 챔피언’이라고 압박하더니 북핵 대북공조를 이끌어낸 지난달 7일 미중정상회담 이후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존경한다며 환율조작국 지정 방침을 철회한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 간 집단안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흔들었다. 나토를 ‘무용지물’이라고 부르고 회원국이 공격 받아도 무조건 개입하지 않겠다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재촉하다 최근 러시아 스캔들로 입장이 곤란해지자 ‘나토가 국제 평화·안보를 지키는 방어벽’이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미국이 주도해온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를 공언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중단을 선언하는 등 기존 세계 안보·경제질서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트럼프가 무서운 이유는 세계 최강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폭탄선언을 한 뒤 실제 전쟁(시리아 공습)을 벌이거나 단지 제안일 뿐이라며 쉽게 뒤집곤 하기 때문이다. ‘남아일언 중천금’을 금과옥조로 배워온 동양에선 물론이고, 의전을 중시하는 서양 외교무대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든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허풍쟁이일까? 그렇지 않다. 트럼프가 의도하는 것은 자명하다.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을 헷갈리게 함으로써 실리를 취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포커 게임에서 우세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상대가 내 카드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뻥카(블러핑)’와 진짜 ‘족보(높은 패)’를 적절히 섞어 돈을 따고 게임을 즐기려는 게 진짜 목적이다.
트럼프가 토니 슈워츠와 같이 쓴 <거래의 기술>(1987년)이란 책에는 그만의 사업 성공비결은 물론, 초등학생 때 선생님을 폭행했다는 이야기 등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또 ▲크게 생각하라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선택의 폭을 최대한 넓혀라 ▲지렛대를 사용하라 ▲언론을 이용하라 ▲희망은 크게, 비용은 적당히 등 치밀하게 계산된 트럼프의 협상원칙 11가지도 엿볼 수 있다.
사드 비용 10억달러를 한국이 지불하라는 발언은 앞으로 트럼프가 제시할 청구서의 일부이자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협상 원칙을 감안할 때 청와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백악관 허버트 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이 사드 비용 논란을 진화하려다 오히려 확산시킨 것도 예견된 일일 수 있다.
한미 간 핫라인으로 미국이 사드 비용을 지불키로 했다는 기존 합의의 유효성을 재확인했다는 청와대 해명은 공허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언급은 동맹국들의 비용 분담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여망을 염두에 두고 일반적 맥락에서 이뤄졌다’며 재협상을 강조한 맥마스터의 발언 때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 나토 등 미국의 확장억제 전력에 안보를 의지하는 동맹국들에 대한 채무이행 요구이지, 기존 합의를 준수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사드 뿐 아니라 핵추진 항공모함과 잠수함 등 한국 정부가 상시배치해달라고 요구하는 미군의 전략자산 전개를 당연시하지 말라는 경고이자 청구서다. 현재 한국 해군과의 연합훈련을 위해 동해상에 있는 항모 칼빈슨 한 척의 건조비용만 약 5조원, 1년 운영비만 3000억원이 넘는다.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경제적 실익 외에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이다. 백악관은 지난달 29일 취임 100일을 맞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적인 안보 업적으로 북한 고립과 미사일 시험발사 도발에 대비한 군사적 전략자산 재배치 등을 꼽았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 안보 회복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며 “그는 지난 수년간의 실패한 외교정책 때문에 국가 안보를 위협하게 된 국가들에 맞서 왔다”고 치켜세웠다.
문제는 트럼프가 아니라 현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초래한 참담한 현실이다. ‘북핵과 미사일’은 애초 남북관계가 아니라 북미관계에서 출발한 이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한국이 해결하겠다며 ‘사상 최강의 대북제재와 압박’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다 중국의 보복까지 불러온 결과물이 바로 트럼프의 1차 사드 청구서인 셈이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국인 한국이 안보에 큰 위협이 되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묵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북핵문제를 한국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처럼 나서다 트럼프의 장삿속만 충족시켜준 것은 아닐지 우려된다.
지난 1월 출범 후 국방장관과 국무장관, 부통령, CIA 국장 등이 한국을 최우선적으로 방문하며 북핵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준 트럼프 정부가 이제 한국 차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본격적인 채권국 권리행사에 나선 것은 아닐까?
◆ 차기 한국 정부의 핵심과제는 한미동맹 재조정과 미래 설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7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사진=AP/뉴시스> |
사드 청구서 논란의 핵심은 현재의 한미동맹을 어떻게 재조정하고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차기 한국 정부가 그리는 양국관계 청사진이 북핵과 사드는 물론, ‘한·미·일 대(對) 북·중·러’라는 동북아시아 신냉전구도를 해소하는 데 중요한 갈림길이 될 전망이다.
얼마 전 만난 한 한반도 전문가는 “한미동맹은 미영동맹이나 미일동맹과 다르다”며 “영국과 일본은 미국의 글로벌동맹으로서 대부분의 이해관계를 같이 할 수 있지만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낀 반도국가라 미국과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할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도 한미관계는 한국의 핵·미사일 개발 등으로 미일 관계와 달리 항상 삐거덕거렸다”며 “한국은 한미동맹을 미래 안보의 기본축으로 가져가되 북한, 중국, 러시아와의 적극적 북방외교를 통해 양 세력 사이에서 운신할 수 있어야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미관계에 정통한 한 예비역 장군은 “한미동맹이 비대칭인 것은 국력 차이로 어쩔 수 없지만 한국이 미국과의 군사협상에서 일방적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은 전두환 정권 때부터”라며 “당시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전 전 대통령이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미사일은 물론 로켓 개발도 하지 않겠다는 양해각서를 미국에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매년 북한보다 훨씬 많은 국방비와 연구개발비를 쓰면서도 미사일은 물론 인공위성 기술발전에서까지 뒤쳐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사드 청구서는 오히려 ‘트럼프 리스크’란 안보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곧 출범할 차기 정부가 한국 외교안보와 경제를 업그레이드시킬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트럼프의 노림수는 미국이 확장억제 전력을 제공하는 국가로부터 실리를 챙기고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업적도 쌓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지금처럼 미국에만 목매는 모습을 보이면 북핵 공조에 동참한 중국을 환율조작국 지정 방침에서 철회하는 대가가 담긴 계산서까지 한국에 청구할 수도 있다.
차기 정부가 미국과 협상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드, 방위비 분담금, 전략자산 배치, 한미FTA 등 수없이 많은 의제들을 케이스별로 나누지 말고 전체적인 외교안보와 경제라는 큰 틀에서 전략을 짜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대화와 6자회담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정부의 안보 업적을 만들어줄 수 있다. 또는 향후 북한을 관통하는 러시아 시베리아 가스 개발사업에 트럼프 일가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CEO를 지낸 엑슨모빌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한국의 국익인 안보 레버리지와 경제성장, 평화통일을 위한 보장 등을 받아내야 한다.
이번 사드 청구서 사태처럼 온 나라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면 트럼프로서는 한국의 패를 죽이는 ‘뻥카’에는 10억달러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가질 수도 있겠다.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선임기자 (medialyt@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