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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시대] 인간 문재인...'흥남철수'에서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기사등록 : 2017-05-10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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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난 '흙수저'
노무현 전 대통령 만나 정치 입문
시련 털고 19대 대통령 당선

[세종=뉴스핌 오승주 기자] 차기 대통령을 확정지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피난민의 ‘흙수저’ 아들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해 ‘비단길’이 펼쳐져 있었지만, ‘데모’ 경력이 발목을 잡았다.

인권 변호사로 노무현을 만나 정치에 눈을 떴고, 촛불이 열어준 길을 밟아 10일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에 이름을 올렸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이 10일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광화문인사에서 지지자들 연호에 악수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아버지는 피난민

아버지는 피난민이었다.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1·4 후퇴 때 고향 흥남을 등지고 ‘흥남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이었다. 미국 군함을 탄 아버지는 경남 거제에 정착했다.

피붙이 하나없는 낯선 남쪽 땅. 문재인은 흥남에서 내려온 가난한 피난민의 아들로 전쟁통이었던 1953년,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으로 이주해 철이 들기 시작한 무렵 장남 문재인이 늘 본 것은 장사에 나선 아버지와 연탄배달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연탄 리어카를 끌고 미는 일은 장남 문재인의 몫이었다. 힘겹게 끌다가 리어카와 함께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진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

부모님은 한 끼 밥값을 아껴서라도 장남에게 책을 사줬다. ‘당신의 아들은 당신들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문재인 역시 가난 속에서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을 굳게 믿었다.

◆‘흙수저’가 용꿈을 꿨지만

뺑뺑이가 아닌 입시로 입학을 결정짓던 시절 부산 경남중과 경남고는 부산 경남의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학교였다. 문재인은 1968년 경남고를 수석 입학했다. 그러나 사춘기는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술과 담배에 손을 댔고, 싸움을 하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술마시고 담배피고…그 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숨막히는 당시 세상에서 규칙, 그거 너무 잘지키면 온순한 시민, 순종적인 시민밖에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신 차리고 공부에 다시 몰두했다. 재수 끝에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72년도)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반항’은 이어졌다. 1972년,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그는 고시 준비 대신 유신 반대 시위를 시작했다. 1975년 4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것으로 훗날 드러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연루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대규모 학내 시위를 주도해 체포됐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했다.

석방 후에는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31개월 복무 기간에 맞기도 참 많이 맞았다. 1978년 제대했다.

◆비단길 입성해도...

제대 후 부친상을 겪었다. 아버지의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1979년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다시 시위를 벌이다 계엄령 위반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2차 시험 합격증은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경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 실패했다. 1982년 부산으로 돌아온 뒤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 때 운명적인 한 사람을 만났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의 변호사. 노무현과 함께 노동자와 ‘없는 사람’을 위한 무료 변론에 나서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당초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으로 부산선거대책위원회 본부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다.

노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는 조건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1년 만에 청와대를 나왔다. 그러던 중 노 전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들었다. 변호인단 간사로 돌아와 탄핵을 저지하는 데 일조했다. 2007년엔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심한 스트레스로 이빨을 10개나 뽑았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국장 상주를 맡았다. 국장에 참석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백원우 전 의원이 “살인마, 여기가 어디라고”라고 소리치다 끌려나갔다.

백 전 의원을 대신해 상주인 그가 이 전 대통령에게 다가가 고개숙이고 사과했다. 후배인 백 전 의원이 행여라도 당시 서슬퍼렇던 이명박 정권에서 고초를 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였다.

10일 새 주인을 맞은 청와대<사진=뉴스핌DB>

◆대통령의 꿈, 이루다

국회에 진출한 것은 의외로 늦은 2012년. 2011년 발간한 자서전 ‘운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고 고백한 이후였다.

부산 사상에서 국회의원이 된 그는 18대 대선에 출마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일전을 겨룬다.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야권 후보로 나섰다. 역대 당선자를 능가하는 득표(1469만 표ㆍ48%)를 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며 낙선을 주도한 ‘국정원 댓글사건’이 불거졌지만 깨끗이 물러섰다.

대신 그는 차기 대선주자의 역량을 본격적으로 쌓아 갔다. 그래도 시련은 차고 넘쳤다. 2015년 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지만 재보선에서 패배하고 안철수 전 대표가 탈당해 국민의당을 만드는 등 위기가 이어졌다.

사퇴 요구와 ‘친문(친 문재인) 패권주의’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4ㆍ13 총선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위기론을 대세론으로 바꾸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가 이끈 더불어민주당은 123석을 얻어 제1당 지위에 올랐다. 당초 100석도 얻기 힘들 것이란 비아냥을 한번에 털어 버렸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대통령의 길을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며 유력 대선주자 자리를 굳혔다. 4월3일 당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됐고, 5월9일 대선에서 승리하며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뉴스핌 Newspim] 오승주 기자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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