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범준 기자] 24일 2차 전국법관대표회의(판사회의)가 예고되면서 '5차 사법파동'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뉴시스] |
이른바 '사법파동'은 현직 판사들이 사법부의 독립 보장과 개혁을 요구하며 벌이는 집단행동을 가리킨다. 지난 1971년을 기점으로 1988년, 1993년, 2003년 총 네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1차 사법파동(1971년)
최초 사법파동은 지난 1971년 이규명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의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 등에 대해 향응접대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발생했다.
사건의 전말은 1971년 당시 헌법소원과 위헌법률심판을 담당하던 대법원이 "군인 등 특수신분의 경우 직무상 피해를 입더라도 국가에 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은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성, 평등권, 국가배상청구권에 반한다"면서 위헌 결정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결정으로 정부는 10억~40억원의 재정부담을 지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7월28일 새벽.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당시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의 판사 두명과 입회서기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재판부가 제주시로 증인검증 차 출장 당시 비행기탑승료·주대(酒代)·여관비 등의 명목으로 9만7000원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러자 법원은 정권의 보복조치라고 반발하며 영장 신청을 기각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국 법원판사 455명 중 150여명의 판사들은 "판사 개인 비리가 아닌, 검찰이 기소한 공안사건에 대해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린 것에 대한 정권의 보복조치"라면서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1971년 7월28일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42명 중 37명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모습. |
사태가 커지자 당시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은 신직수 법무부장관에게 판사들에 대한 수사 중지를 지시하고 담당 검사에 대해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파동이 진정되지 않자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은 판사들에게 사표를 철회해 달라고 호소했고, 비로소 법관들이 사표를 철회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2차 사법파동(1988년)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또다시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6·29선언과 현행 헌법인 9차 개헌 등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당시 노태우 정부가 전두환 정권에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했기 때문이다.
1988년 6월 2차 사법파동으로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퇴진하며 청사를 나서는 모습. |
1998년 2월, 335명의 소장판사들은 사법부 수뇌부의 개편을 주장하는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명 '사법부쇄신 요구사건'으로 불리는 2차 사법파동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유임시키려 했던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의 사퇴와 정보부 기관원의 법원 상주 폐지, 법관의 청와대 파견중지, 유신헌법철폐 등을 요구했다.
결국 김 대법원장이 퇴진하고 후임으로 이일규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마무리됐다.
◆3차 사법파동(1993년)
1993년 6월. 3차 사법파동은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했던 문민정부에서 발생했다.
박시환 당시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비롯한 30여명의 민사단독 판사들은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통해 "법원장 회의에서 논의된 제도개혁안은 사법부 개혁의 일부일 뿐이며, 사법부의 자기반성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고 발표했다.
지난 2011년 대법관 퇴임식 당시의 박시환 전 대법관 모습. [뉴시스] |
판사들은 법원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법관의 신분 보장과 법관회의를 요구했고, 변호사단체와 사법연수생까지 합류하면서 더욱 확산됐다. 김덕주 당시 대법원장이 퇴진하면서 3차 사법파동은 일단락 됐다.
◆4차 사법파동(2003년)
2003년 사법개혁을 주장하며 사표를 낸 박시환 당시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이었던 2003년. 박시환 당시 서울지법 부장판사가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을 통해 대법관 인선 관행에 항의하며 나섰다. 10년만에 다시 발생한 4차 사법파동이었다.
비록 김용담 당시 대법관이 예정대로 인선됐지만, 4차 사법파동으로 인해 열린 전국법관회의 이후 전효숙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는 파격 인사가 있었다.
또 김영란 당시 대전고법 부장판사도 여성 첫 대법관이 되는 등 대법관 인선 관행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2010년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김영란(왼쪽) 전 대법관 및 2005년 행정도시특별법 헌법소원심판 선고공판에 참석한 전효숙(오른쪽) 당시 헌법재판관의 모습. [뉴시스] |
[뉴스핌 Newspim] 김범준 기자 (nunc@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