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조현정 기자] 지난해 경주 지진 이후 국회에서 지진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려는 법안들이 쏟아졌지만 대부분 처리되지 못하고 계류 중인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앞다퉈 피해 현장으로 달려가 반짝 관심을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고개를 돌리는 정치권의 나쁜 관행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여야는 지난 15일 포항 지진과 관련해 피해 대책 마련에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피해 현장을 찾아 복구와 지원을 약속하는 정치권이 정작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는 뒷전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국회가 지진 관련 후속 대책 마련에 소홀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5일 경북 포항에서 진도 5.4의 강진이 발생한 후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17일 오전 경북 포항시 한동대학교 건물에 지진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이형석 기자 leehs@ |
◆ 내진설계 강화 등 잠자는 법안 '수두룩'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경주 지진 이후 지진 예방 및 대응과 관련해 발의된 법안은 이날 현재 총 49건이다. 법안에는 교육시설 및 일반 건축물의 내진 설계 강화와 대피소 마련, 활성 단층 연구·조사 지원 등 다양한 대책이 포함돼 있다.
이 중 10건의 법안만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나머지 39건은 방치되고 있다.
먼저 내진설계와 관련,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월 국토교통부 장관이 내진 등급에 따른 건축물 구조 및 재료의 기준을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고 이에 따른 점검과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건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해 7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민간 소유 건축물에 대한 내진 보강 비용을 일부 보조할 수 있도록 하는 지진 및 화산 재해 대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장 의원은 올해 3월 국가 또는 지자체가 민간 건축물 내진 보강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재차 발의했다.
김병관 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지역난방열수송관 등을 내진설계 기준 시설에 포함하는 법안을 냈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도 7월 물류 시설을 내진설계 기준 시설 대상으로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진 발생 예측 차원에서 지질단층 조사를 강화하는 법안도 제출돼 있다. 신용현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달 한반도 전역의 단층을 대상으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고 관계 기관이 공동으로 조사 연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지진 및 화산 재해 대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번 포항 지진으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 원전 관련 법안도 있다. 윤영석 한국당 의원은 지난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규정보다 한층 강화된 기준을 적용해 원전 부지 40km 이내에 활성단층이 있으면 원전 건설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원자력안전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윤재옥 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지진·화산 재해 대책법 개정안은 지난 9월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지진 안전 시설물 인증 제도를 도입하고 지진·화산방재정책심의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지진으로부터 건축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건축법 개정안도 많다. 김영주 민주당 의원은 올 1월 고층건축물에 설치된 승강기에 지진 감지 장치 설치와 관제 운전을 의무화하는 건축법 개정안을 냈다.
박찬우 한국당 의원은 지난 9월 내진설계 의무 대상 건축물 전체를 내진 능력 공개 대상으로 지정해 설계 의무와 정보 관리 의무의 불일치를 해소하는 건축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또 지진 피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학교 시설물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법안들도 눈에 띈다.
지난해 말 기준 학교의 내진설계율은 23.1%로 공공 건축물 가운데 가장 낮은 편이었다. 이번 포항 지진 역시 포항 수능 시험장 14곳 중 10곳에서 균열이 발생해 수능 연기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유은혜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교육 시설의 체계적 안전 관리·감독을 명시한 교육시설기본 법안을 발의했다. 이용호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발의한 '교육시설 내진보강기금법안'은 교육시설의 내진 설비 보강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1년째 국회에 묶여 있다.
김병욱 민주당 의원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중 재해대책 특별교부금을 내진 보강 등 재해 예방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용도를 확대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을 지난해 9월과 11월 각각 내놓았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 <사진=뉴시스> |
◆ "법안 처리 속도 내야"…국회 문턱 넘나
이처럼 지진과 관련한 법안들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지만, 문제는 '실제 입법까지 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지난 19대 국회 때도 30여 건의 지진 관련 법안이 제출됐지만 임기 만료 사유로 절반 가까운 법안들이 자동 폐기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여야는 해당 상임위에서 지원책을 논의하고 대책 방안도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와 복구 상황 파악에 주력하는 한편, 입법 작업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국회에서 잠자는 법안들이 국회의 문턱을 넘어설지 주목된다.
안규백 민주당 의원은 "현행 건축법상 내진 등급을 설정하도록 하고 있다"며 "이에 따른 세부 관리 지침이 미흡하고 건축물의 내진 능력 공개를 의무화하는 데 그치고 있어 실질적인 안전 관리 지침이 되지 않고 있다"며 정해진 기준에 따른 점검과 처벌 대폭 강화를 주장했다.
박찬우 한국당 의원은 "지진 피해에 가장 취약한 소규모 저층 건축물이 내진 능력 공개 대상에서 제외돼 서민 불안이 커지고 있다"며 "소규모 저층 건축물의 내진 능력을 공개해 내진 능력 확보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 관계자는 "여야 지도부가 전날 포항 지진 피해 현장에 내려가 (지진 피해 예방을 위한 대책 마련) 약속을 했기 떄문에 정쟁과 상관없이 민생 법안으로 올해 안에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며 "다만 내진설계 등 업계 부담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뤄질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뉴스핌 Newspim] 조현정 기자 (jhj@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