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무형문화재는 한 민족의 전통과 얼,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척도다. 유형문화재가 옛 선조들의 기술과 지혜의 집약체라면, 무형문화재는 고도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이 함축된 민족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2018년 현재 무형문화재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를 보존하기 위한 예산은 점점 줄어들고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에 대한 예우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전승자들에 대한 ‘처벌’ 중심의 관리체계도 무형문화재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존폐의 갈림길에 놓인 무형문화재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서울=뉴스핌] 임성봉 기자 =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A씨는 2015년 전승지원금 및 공개행사 지원비와 관련해 업무상횡령, 보조금의 예산 및 관리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100만 원의 벌금형(구약식)을 선고받았다. 문화재청은 즉각 A씨의 전승자 자격을 박탈했다. 정식재판을 청구한 A씨는 1년 간의 법적다툼 끝에 무죄를 판결받아 가까스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A씨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로부터 이미 ‘범죄자’ 낙인이 찍힌 뒤였다.
#또 다른 전승자 B씨도 사문서 위조 혐의로 1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문화재청으로부터 2013년 전승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구체적으로는 이수증 발급과 결과보고서를 위조했다는 혐의였다. B씨는 문화재청에 구제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B씨 역시 홀로 2년 동안 법적 다툼을 벌인 끝에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벌금형 받으면 무조건 자격박탈..독소조항 악용해 고소·고발 난무
4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현행법은 벌금형 이상을 선고받은 전승자는 무조건 지위를 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제21조(전승자 등의 인정 해제) 1항에는 “문화재청장은 국가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보유단체, 명예보유자 또는 전수교육조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인정을 해제할 수 있다.
다만, 제1호부터 제4호까지의 규정에 해당하는 경우 그 인정을 해제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 2호는 “전통문화의 공연·전시·심사 등과 관련해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거나 그 밖의 사유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경우”다. 전승활동과 상관없는 이유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더라도 반드시 전승자격을 박탈당하는 셈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의 인정해제와 관련한 현행법상 조항. [캡쳐=국가법령정보센터] |
이를 두고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은 “무형문화재 보존단체들이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는 가운데 이 같은 독소조항을 악용한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전승자들이 보존단체에서 주도권 싸움을 벌이면서 경쟁자를 내쫓기 위해 해당 조항을 악용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북청사자놀음(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보존회는 제명된 전수조교들이 보존회장을 상대로 사문서위조와 국가보조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강령탈춤(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보존회 역시 제명된 전수조교가 “보존회장으로부터 조교비를 지급받지 못했다”며 법적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손혜원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벌금형 이상으로 자격 박탈된 보유자 현황(최근 10년)’자료를 살펴보면 총 4명의 전승자가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들 모두 실형이 아닌 벌금형을 선고받은 후 이 같은 처분을 받았다.
문화재위원을 지냈던 C씨는 “해당 조항과 관련해 문화재위원회 내부에서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가 있었다”며 “해당 조항이 보존회 내부 갈등에 악용되면서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문화재청에서 이를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 '전승자 박탈 함부로 못한다'
인근 일본에서는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에 대한 자격 박탈이 까다롭게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문화재보호법 153조 1항에는 △문무대신은 보유자가 심신에 고장(故障)으로 보유자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경우 △보유단체가 그 구성원의 이동으로 보유단체로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경우 △그 외에 특수한 사유가 있는 경우 문화재심의회 자문을 받아 해제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벌금형'을 받으면 전승자격을 해제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은 없다. 자격 박탈과 관련해서도 우리나라처럼 의무적으로 전승자격을 ‘해제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는 보다 완곡한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자격 박탈 사유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유연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특히 보유자의 전승자격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재심의회의 자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는 점도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일본의 문화재심의회는 우리나라의 문화재위원회와 역할이 비슷한 기구다.
일본은 문화재심의회를 통해 중요무형문화재 전승자의 기량과, 역사 및 학술적 가치 등을 바탕으로 전승자의 자격 박탈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승자에게도 소명 기회를 부여하고 이를 포함한 종합적 기준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 전승자의 지위를 무분별하게 해제할 경우, 중요무형문화재의 명맥이 끊길 수 있어 여러 단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놓은 것이다.
◆합리적 절차 마련해야
이와 반대로 한국은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의 지위를 박탈하는 과정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법원의 1심 판결만으로 지위를 박탈하거나 혐의에 대한 소명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이 제작한 안내 팸플릿. [사진=국립무형유산원] |
현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전승자의 지위가 해제되는 경우는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전승자가 정신장애를 앓거나 기량이 떨어지는 경우 △특별한 이유 없이 전승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 △공개평가회를 진행하지 않는 경우 등이다. 이 외에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없이 문화재청이 전승자격을 박탈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심 재판에서 벌금형 이상을 선고받으면 2심, 3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을 때까지 지위 회복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실제로 1심에서 1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자격을 박탈당했던 전승자 2명은 고등법원과 대법원까지 간 끝에 무죄판정을 받아 가까스로 지위를 회복했다. 이들은 1심 판결에 따라 자격을 박탈당한 후 각각 1~2년 동안 전승활동은 물론 정부지원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국가무형문화재 기능 종목 전수조교 D씨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문화재청이 최소한 소명기회를 주거나 구제 방안을 마련해야줘야 하는 것 아니느냐"며 "전승자가 소송에 휘말렸더라도 최종심의 판단이 나올때까지 문화재청이 행정조치를 유보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혜원 의원은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의 개인적 일탈이나 순간의 실수를 이유로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이라며 “특히 이 과정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 따져보고 제도정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imbong@newsp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