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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헌규의 금일중국] '이념도 모택동도 물러가라' 투쟁종식 경제우선 결의한 11기 3중전회

기사등록 : 2018-12-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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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40년 전인 1978년 베이징(北京)의 한 호텔에서 중국 ‘중앙공작회의’가 열렸다. 문화대혁명 중 실각했다가 막 복권한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 회의에서 중요 방침으로 ‘해방사상 실사구시’를 제시한다. 공작회의 직후 중국 공산당은 12월 18일에서 22일까지 중국 역사를 바꾼 11기 3중전회(11기 당대회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개최한다.

당시 중국은 신중국 설립 30년이 됐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급진 좌경화 정치투쟁 때문에 경제 분야에서 세계 최빈곤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1978년 중국의 1인당 GDP는 155달러로 남아공의 3분의 1수준에도 못 미쳤다. 세계은행 통계 연감에는 당시 중국의 세계 경제 순위가 맨 꼴찌에서 세번째로 기록돼 있다.

덩샤오핑이 제시한 ‘해방사상 실사구시’는 11기 3중전회의 아젠다로서, 개혁개방의 실천 구호가 된다. 이는 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으로 점철된 문혁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실천을 최우선으로 삼아 경제발전에 매진한다는 선언이다. 이때부터 중국은 경제건설을 정치와 혁명의 상위에 두고 '공업 농업 국방 과학기술' 등 4개 현대화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다.

11기 3중전회에서 현대화건설에 관한 결의가 나온 뒤 중국 공산당은 그 즉시 전 당의 업무를 경제건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專 경제발전)과 홍(紅 이념투쟁)의 대립속에서 전자는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추종파)로 몰려 죽임을 당하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짚어진 것이다. ‘잘 살아보자’는 함성과 경제건설 깃발이 전 중국을 들불처럼 뒤덮었다. 개혁개방은 그렇게 시작됐다.

11기 3중전회 즈음 안후이(安徽)성 펑양(鳳陽)현 샤오강(小岡)촌 농촌마을에서 개혁개방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일대사건이 벌어졌다. 18가구의 농민들이 당국 몰래 비밀 집회를 갖고 집체 농지를 분배해 각자 자경농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당시만해도 여전히 철저한 집단 농장제 사회여서 체포되면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 농촌 개혁개방의 발원지 샤오강촌 [사진=바이두]

농민들은 일이 잘못될 경우 서로의 가솔들을 책임진다는 서약까지 하고 비밀 계약서를 통해 집체 토지를 분배한 뒤 각자의 땅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당시 계약서는 지금도 국가박물관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농민들의 이런 시도는 개혁개방의 서막과 같았다. 당국이 나중에 이를 인정하고 다바오간(大包干, 농가책임생산제)제를 확산시키며 농촌 체제 개혁에 나섰기 때문이다.

1984년에는 농가책임생산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농업 생산량이 급증한다. 이해 처음으로 중국 1인당 농업 생산량은 400킬로그램(㎏)으로, 세계 평균 수준에 도달한다. 식량 생산이 늘고 잉여 농산물 판매로 화폐수입이 생기자 향진(鄕鎭, 읍면단위)사회에 자영업 투자가 늘어났다. 당시 매체들은 향진기업 붐을 일컬어 “집집마다 불이 환하게 켜지고 거리엔 자영 두부공장이 생겨났으며 장사가 활기를 띠었다”고 보도했다.

농촌에서 싹을 틔운 향진기업이 공업 부문에 들어오자 시장(가격)질서에 큰 변화가 불어닥쳤고 경쟁력이 처지는 국유 공업기업들은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체제개혁의 산물인 향진기업과 비효율 철밥통의 대명사인 국유부분을 공존시키기 위해 중국은 쌍궤제(雙軌制, 이중가격제)를 시행한다. 고용 등 개혁초기 사정을 감안해 시장과 계획이라는 두 축의 수레바퀴를 유지한 것이다.

중국은 농촌 청부생산제 경험을 도시의 국유부문으로 옮겨 기업 경영청부제를 시행한다. 요즘 상장기업의 모태가 된 주식제 기업 개혁에 돌입한 것이다. 전민 소유제 기업법 대신 1990년대 공사법(회사법)이 제정되면서 국가기관(단위)인 국유기업이 기업 형태로 전환된다. 이로써 주식제 회사가 생겨나고 점차 시장 제도의 기초가 다져진다. 1994년에는 재정 세제 금융 체제개혁 및 환율 개혁이 이뤄지면서 시장경제 제도가 한층 공고화된다.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이미지 [캡쳐=바이두]

중국 개혁개방은 농촌 체제개혁으로 부터 시작해 도시 국유기업 체제 개혁으로 번져나갔다. 중국은 내부 체제 개혁으로 외자 공장을 유치한 뒤 대외개방을 통해 제조업 위주의 수출 산업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수출주도형 경제가 된 중국은 2001년 12월 8일 WTO 가입으로 글로벌 경제 체제에 편입하고 왕성한 경제 번영을 누린다. 전문가들은 WTO가입이 아니었다면 중국의 초고속 성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폭발적인 수출무역 증가로 중국은 지난 2004년 처음으로 외화보유액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세계 최대 수출 무역국가로 등극한 이래 현재까지 흑자 기록을 유지하고 있고 비약적 성장을 거듭한 끝에 지난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G2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현재 제조업 선진화 비전인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가 속도를 내고 있어 중국 경제는 조만간 첨단 IT기술 제조의 질적 성장 구조로 전환될 전망이다. 

1978년 155달러에 머물렀던 1인당 GDP는 2017년 기준 8832달러로 늘어났다. 올해(2018년)엔 최초로 1만 달러대를 돌파할 전망이다. 40년 전만 해도 인구의 97.5%가 빈곤층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미국 인구에 가까운 3억 명이 중상 수입계층에 속한다. 중국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 한 해 전인 2020년에는 절대빈곤을 완전히 해소하고 14억 명의 국민 생활이 풍족한 꿈의 샤오캉(小康)사회를 이룬다는 계획이다.

 

chk@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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