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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고종 황제 국장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기사등록 : 2019-02-2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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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3일 고종 황제 국장, 올해 100주기 맞아
문화재청, '100년전, 고종 황제의 국장' 전시 3월 개최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동시에, 고종 황제 제향 100주기이기도 하다. 당시 고종 황제의 국장은 3월 3일 열렸는데, 상황을 들여다보면 일제시대 조선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직후, 고종이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독살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역시 일본이 고종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인이 시켜 식혜에 독을 타서 드리게 했다. 독이 온몸에 퍼지니 황제가 소리치기를 '내가 무얼 먹었기에 이러하냐' 하더니 잠시 후 붕어했다. 두 눈은 붉고 온몸에 반점이 생기며 부패해 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황제 [사진=문화재청]

일본이 고종을 독살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본이 1919년 1월 25일 예정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게 자기들로서는 한일합병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독살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종의 국장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했다. 그렇다보니 일본식으로 진행됐다. 본래 조선에서는 왕이 승하하면 임시 기구인 '도감'이 설치되고 우두머리는 예조판서가 맡는다. 반면 일식으로 진행된 고종의 국장 절차는 크게 축소됐다. 일본 왕공족 다케히토 친왕의 장례에 준해 치러졌고 장의괘장에 야마가타 이사부로, 제관장에 이토 히로쿠니(이토 히로부미의 양자), 장의괘차장에 이완용, 제관부장에 조동윤의 이름이 올랐다.

고종 황제 국장 절차 기록한 의궤. 기록은 전통식으로 되어있다. [사진=문화재청]

고종 황제 국장의 행렬도 조선식과 달랐다. 전통 국장 행렬은 혼을 모신 신연과 관을 모신 대여가 하나의 행렬을 이루며 왕릉으로 향한다. 왕릉에서 제사를 지낸 후 관을 묻고 혼을 모신 가마를 들고오며 '혼은 가져온다'는 의미를 둔다.

그러나 총독부가 주도한 고종 황제의 국장은 대여 행렬과 신연 행렬을 분리했다. 신연 행렬은 전통식 국장 행렬을 따라 종로로 향했고 대여는 행렬을 따라 국장식이 열릴 훈련원으로 향했다.

3월 3일 오전 10시 훈련원에서 고종 황제의 국장식이 이어졌다. 전통적인 국장 절차에는 없던 의식이다. 국장식 이후 대여 행렬은 동대문 밖에서 신연 행렬과 만났다. 국장 행렬은 청량리에서 노제를 올린 후 망우리를 거쳐 홍릉에 도착했다. 그리고 청량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릉을 홍릉에 옮겨 합장했다.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가는 상황은 고종 황제의 사진을 수록한 월간 잡지 '여가사진'에 기록(1919년 3월)돼 있다. 

고종 황제 국장 사진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 관계자에 따르면 홍릉은 조선 왕조의 능과 매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이 관계자는 "홍릉은 전각의 명칭이나 석물의 종류, 배치에 적용된 황제릉의 형식이 명나라 능제를 참고했다. 고종은 1900년에 능터를 정한 후 1904년까지 전각을 구성했다. 석물을 보면 코끼리, 낙타도 보인다. 그런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왕릉 조성이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어 "보통 국장 기간에 황후의 능을 옮겨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생전 고종이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 자신과 합장하기 위한 의지가 뚜렷했기 때문에 이를 따른 것"이라고 언급했다.

조선식 국장은 왕릉 조성 조치까지 5개월이란 시간이 걸리나 일식으로 열린 고종 황제의 국장은 이보다 훨씬 짧은 42일 동안 진행됐다.

국민 10만명이 서울로 모여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게 한 고종 황제의 죽음은 잠재적으로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3.1운동의 요인은 국내로는 고종 황제의 죽음, 대외적으로는 민족자결주의였다. 국민들이 스스로 일어나 조국의 독립을 외친 3.1운동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힐 수 없는 역사적 기록과 기억으로 남아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지병목)은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작은 전시를 개최한다. 이 전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3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간 이어진다.

고종 황제 국장 사진 [사진=문화재청]

전시 규모는 작으나 '고종의 승하' '고종의 국장' '고종의 영면' 등 3개 주제로 나눠 역사적 사건을 친절하게 짚고 있다. 국장 때 촬영된 당시 사진과 의궤 등에 남겨진 기록, 고종이 잠든 홍릉의 사진 등 15건의 작품이 소개된다. '순종황제실록 부록'과 '영친왕비 일기' 같은 기록에서는 고종 황제의 승하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태왕전하어장주감의궤(고종 황제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 '덕수궁인산봉도회등록(고종 황제의 국장 때 대여를 맨 민간단체의 기록)' 등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고종 황제의 국장이 일본식으로 진행되면서 기존 국장에 비해 절차가 축소되고 변형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함께 전시되는 두 건의 '고종 황제 국장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들은 국장의 진행 과정과 그 의미를 더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외에도 고종 황제의 승하 당시 제작된 어보와 옥책으로 여전히 남아있던 당시 왕실 의례의 면모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함께 잠든 남양주 홍릉의 사진과 기록을 전시해 대한제국 황제릉의 성격과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능으로서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홍릉의 능제와 그 의미를 소개한다.

한편 오는 3월 21일 오후 2시 전시와 연계한 특별 학술강연회가 '고종 국장과 1919년 사회'라는 주제로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 개최된다. 전시는 두 가지 주제로 진행되는데, 제1강연에서는 이욱 선임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고종황제의 국장 과정을 분석해 대한제국 황실 의례가 국권피탈 이후 어떻게 변형됐는지 살펴본다.

이어 제2강연에서는 윤소영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 고종 국장으로 인한 당시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국권 피탈 후 억눌린 민족의 한이 3.1운동으로 폭발하는 과정을 발표한다.

  

89hklee@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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