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20년 만에 복원됐다. 문화재 복원의 최장기간 기록을 세운 미륵사지는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러브스토리가 담겨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는 곳이다.
선화공주와 무왕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나와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의 비는 신라 진평왕의 막내딸 선화공주이며, 현재는 터만 남은 미륵사는 왕비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
미륵사지 석탑(서측) [사진=문화재청] |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렀다. 사자사는 미륵사가 창건되기 이전 존재했던 사찰로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무왕의 근거지이자 서동요의 주무대다. 부인이 왕에게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청했고,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삼국유사 속 미륵사 건립 이야기는 마치 설화처럼 묘사돼 있다. 지명법사가 하룻 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해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칭했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많은 관심을 받은 미륵사는 2009년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해 1월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이 발견됐는데, 그 내용에 관심이 집중됐다.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백제 미륵사가 639년 창건됐다고 적혀 있었다. 또 무왕의 왕비는 백제 대귀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고 명시돼 있었다. 즉,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 복원 초기부터 일을 맡은 배병선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왕비가 '선화공주다 혹은 아니다' '사택적덕의 딸이 선화공주다' 혹은 '왕비가 둘이었을 것' 등 여러 주장이 있다"며 "계속해서 연구해야할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미륵사지 동측 수리 전, 수리 후 [사진=문화재청] |
미륵사는 삼국시대 백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절이다. 그 크기와 명성은 백제 무왕 시대를 지나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대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적인 규모와 가람배치의 특징 등이 밝혀졌다. 동측 석탑은 1991년, 석측 석탑은 올해까지 20년이란 시간이 걸려 복원을 마쳤다. 중간에 목탑이 있었는데 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이다.
배병선 소장은 목탑의 복원 가능성에 대해 "초석은 하나밖에 없고, 기장석도 없다. 물에 휩쓸려 나간 것"이라며 "초기 미륵사는 배수 체계가 잘 만들어졌다. 그런데 조선시대 폐사가 되고 나서부터는 물이 자연적으로 흘렀다. 복원하기엔 추정이 너무 많고, 세계유산이라 복원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외국에서는 추정이 되는 순간, 스톱해야 한다고 원칙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 공개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진=문화재청] |
배 소장은 원형 복원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최근 복원을 마친 서측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9층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시대 이후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고, 1915년 일본인들이 붕괴된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보강했다. 현재 복원 기준은 추정하는 9층이 아닌 기록으로 남아있는 6층까지를 원형으로 삼았다.
그는 "미륵사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문제가 됐다. 동측 탑이 추정복원이었고, 옛날 부재를 하나도 안 썼기 때문이다. 옛날 부재를 한 층마다 하나씩 썼는데, 이건 안 쓴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측 탑은 원형 보존에 충실했다고 강조했다. 배 소장은 "서측 석탑을 복원한 지 15년 정도 됐을 때 심사를 받았는데 모범적인 케이스라고 했다. 대형 건물을 짓고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보존할 만한 노력이 보인다고 판단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라며 "동탑만 있었으면 복원 때문에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 복원 사상 가장 긴 20년이란 시간에 예산 225억원이 투입된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식은 30일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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