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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주권 반환 23년 자치권 무력화, 8대 '홍콩-중국' 충돌 사건

기사등록 : 2020-07-0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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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법 제정으로 23년 전 일국양제 약속 깬 중국
우산혁명∙송환법 시위로 커진 홍콩인 민주화 의지

[서울=뉴스핌] 배상희 기자 = 2020년 7월 1일. 이날은 영국이 홍콩 주권을 중국에 반환한 지 23년째 되는 날이자 홍콩 국가보안법(이하 홍콩보안법)이 정식 시행된 첫 날로서, 홍콩 역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적 사건을 남긴 시간으로 기록됐다.

지난 1997년 7월 1일 홍콩 주권 회복과 함께 중국은 향후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나라 두 체제) 원칙 하에 홍콩에 고도의 자치권(高度自治)을 인정해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홍콩보안법 제정을 강행하며, 23년 전의 약속을 철저히 깨뜨렸다. 홍콩보안법의 등장은 일국양제의 붕괴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서, 홍콩과 중국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23년간 홍콩과 중국 사이에 발생한 8가지 중대 사건을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일국양제' 하에서 양국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홍콩인들의 민주화 의지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 1999년 '최종해석권' 앞세워 홍콩 사법권 개입

1999년 6월 26일. 중국 당국이 주권 회복 후 처음으로 홍콩 사법권에 직접 개입하는 단초를 마련한 날이다.

사건의 발단은 일명 오가령(吳嘉玲)사건에서 시작된다.

1998년 홍콩인이 중국에서 자녀를 낳은 경우 그 자녀들은 홍콩거주권을 받을 수 없었고, 중국 공안기관에 홍콩 이주를 신청하는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하지만, 허가증을 발급받는데 수년이 걸렸고, 이에 홍콩인들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자녀를 홍콩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약 천 명에 달하는 홍콩인들이 이렇게 홍콩으로 들어왔고, 홍콩 정부는 이들을 다시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그 천 명 중 한 명이었던 오가령(당시 10세) 등 4명은 이에 불복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홍콩 법원은 홍콩 정부가 이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기본법 24조 등에 위반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홍콩의 실질적 헌법인 '기본법(우리나라의 헌법에 해당)' 24조는 홍콩에서 출생한 중국 공민과 홍콩에서 7년 이상 거주한 중국 공민, 그리고 이들이 낳은 중국 국적의 자녀는 홍콩영주권을 획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당시 홍콩 행정장관이었던 친중파 둥젠화(董建華)는 기본법 158조 1항에 규정된 '본법의 해석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에 있다'는 내용의 '최종해석권'을 근거로 전인대에 의견을 구했고, 전인대는 기본법 24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앞세워 홍콩 법원의 판결을 뒤엎었다.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기본법 해석은 홍콩의 최상위법인 '기본법'과 맞먹는 효력이 있고, 홍콩 법원의 결정은 중국 전인대의 기본법 해석에 귀속된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중국 당국이 홍콩 기본법 상의 '최종해석권'을 앞세워 홍콩 법원의 위헌 결정을 뒤엎은 가장 최근 사례로는 지난해 발생한 '복면금지법' 사건을 들 수 있다.

지난해 10월 홍콩 정부는 52년만에 사실상 계엄령인 '긴급상황규례조례(긴급법)'을 발동하고 불법과 합법을 막론하고 집회에서 복면 착용을 금지시키는 '복면금지법'을 시행했다.

이후 홍콩 법원은 복면금지법이 필요 이상으로 기본권을 침해, 기본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중국 당국은 기본법에 대한 위헌 여부의 판단 및 결정 권한은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있다면서 홍콩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현재까지 복면금지법에 대한 위헌 판결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홍콩 로이터=뉴스핌]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이 7월 1일 열린 홍콩 주권 반환 23주년 기념식에서 축배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이날 홍콩 도심 곳곳에서는 홍콩보안법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 2003년 '홍콩보안법' 반대하는 최초의 '7∙1집회' 

2003년 7월 1일. 홍콩에서 매년 7월 1일마다 열리는 '7∙1집회'가 처음으로 시작된 날이다.

당시 홍콩 정부는 '기본법 23조'에 근거해 반역, 국가 정권 전복, 국가기밀누설 등 7개 범죄 행위를 처벌 금지하는 내용의 '국가보안법' 제정 시도에 나섰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는 50만명의 홍콩 시민이 도심으로 쏟아져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홍콩 정부의 시도는 무산됐다. 이듬해 홍콩 정부는 해당 법안의 초안을 철회했고, 당시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한 둥젠화 행정장관은 실각됐다.

당시 '7∙1시위'는 홍콩 시민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됐고, 이는 매년 7월 1일이면 열리는 주권 반환 기념 집회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7∙1집회' 참가자 수는 종종 홍콩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만족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 중 하나로 평가될 만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국가적 행사로 꼽힌다. 하지만, 올해 홍콩 정부는 홍콩보안법 사태에 따른 여파를 우려해 17년만에 처음으로 집회를 금지시켰다. 

◆ 2012년 중국 공산당 충성 강요 '국민교육' 반대 시위

2012년 10월 8일. 렁춘잉(梁振英) 당시 홍콩 행정장관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과목을 필수 교과로 지정하는 '국민교육' 의무화 방안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홍콩의 주권은 돌아왔지만, 홍콩인들의 '마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중국 정부는 홍콩의 주권 회복 후 중국과 홍콩 간에 각종 충돌이 발생하는 것과 관련해, 홍콩 시민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홍콩의 운명이 중국과 모두 결부돼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2007년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 주석은 홍콩을 방문했을 당시 홍콩 청소년들에게 국민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민교육 의무화에 반대한 홍콩 시민들은 "중국이 홍콩의 청소년들에게 중국 사상을 '강제 세뇌' 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집회와 단식투쟁 등으로 항거했다.

2014년 9월 28일 홍콩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는 '우산혁명'이 일어났다. [사진=블룸버그통신]

◆ 2014년 홍콩 민주화 의지를 전세계로 알린 '우산혁명'

2014년 9월 28일. 홍콩 시민 민주화 항쟁의 새로운 서막을 연 '우산혁명'이 시작됐다.  

우산혁명은 대규모 시위대가 홍콩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동안 홍콩 도심을 점거한 채 벌인 민주화 시위로, 당시 시위대가 우산으로 경찰의 최루탄을 막아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콩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조슈아 웡(黃之鋒)은 2012년 국민교육 의무화 반대 운동을 주도한 데 이어, 우산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현재 홍콩 행정장관은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우산혁명이 성공했다면, 홍콩 시민들은 1인 1표를 행사하는 직선제로 행정장관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우산혁명은 홍콩 시민 민주화 항쟁의 큰 전환점이 됐다. 혁명을 주도한 1020 세대들이 이 혁명을 통해 홍콩 사회와 중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됐고, 향후 홍콩과 중국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복선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2016년 중국 자본주의 통제 반대하는 '어묵혁명'

2016년 2월 8일.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중국의 설)이었던 이날 밤, 홍콩 카오룽(九龍)반도 몽콕(旺角) 지역 야시장에서 노점상 단속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10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어묵혁명'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노점상 대부분이 홍콩 서민음식을 대표하는 어묵 상점이었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장샤오밍(張曉明) 홍콩 주재 중국연락판공실 주임은 해당 폭력 시위 참가자들을 테러 성향을 띈 '급진적 분리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시위 참가자들을 당시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의 분리주의자와 비슷한 범주에 놓으면서, 이들의 목적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중국 분열에 있다고 판단했다. '독립'은 중국 당국이 설정한 레드라인(한계선)으로,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들의 행동에 대한 강경 대응을 시사한 것이다. 

'어묵혁명'에 참여한 시위자들은 정부의 노점상 탄압을 두고, 중국 자본주의가 홍콩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판단하기도 했다. 당시 일각에서는 어묵혁명을 계기로 중국이 홍콩보안법을 제정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었다.

◆ 2018년 '일지양검' 하의 일국양제 유명무실화 논쟁

2018년 9월 23일. 홍콩과 중국 광둥(廣東)성의 광저우(廣州) 및 선전(深圳)을 잇는 일명 '광선강(廣深港)' 고속철이 정식 개통되면서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도시와 홍콩 간 일일 고속철 여행이 가능해지게 됐다.

해당 고속철의 개통은 일지양검(一地两检) 논란을 불러왔다. 논란의 핵심은 홍콩 고속철 역사 내에 홍콩 및 중국 출입국 심사대를 설치해 중국 치외 법권 지대를 뒀다는 점에 있었다. 쉽게 말해, 홍콩 고속철 역사 내 일부 구역을 중국 대륙의 관할 하에 둔다는 의미다.

당시 홍콩 야당과 시민단체는 일지양검이 일국양제 원칙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홍콩과 중국 정부는 일지양검이 기본법과 '일국양제'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라면서, 오히려 수속 시간을 줄이고 장기적인 경제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홍콩 로이터=뉴스핌] 홍콩 반환 23주년을 맞은 7월 1일 홍콩보안법을 반대하는 시위가 홍콩 도심 곳곳에서 벌어졌다. 수천 명이 시위에 참여한 가운데, 야당 의원들을 포함해 370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 2019년 송환법 반대 최대 규모 '반중 시위'

2019년 6월 9일. '제2의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 반대 시위가 열렸다.

홍콩 시민 103만여 명은 홍콩 범죄인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송환법' 제정에 강력 반발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은 실탄까지 동원하며 강경 대응, 충돌 과정 중 일부 시위대와 경찰이 부상을 입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같은 유혈사태에도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자, 캐리 람 홍콩 행장장관은 시위 발생 88일만에 송환법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반중(反中) 시위로 심화되면서 송환법 철회 이후에도 몇 달간 지속됐다.

이 사태는 홍콩 주권 회복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가장 폭력적인 사태이자, 홍콩 정부가 유일하게 시위 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인 민주화 항쟁 시위로 평가된다.

◆ 2020년 일국양제의 사망 '홍콩보안법' 시행

2020년 6월 30일.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홍콩보안법을 전격 통과시켰다.

홍콩보안법 초안은 국가 분열, 국가정권 전복, 테러리즘 행위, 외국 세력과 결탁 등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4대 행위로 지정, 이를 금지∙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홍콩 내 국가안보 관련 기관을 설치해 특정 상황에서 '극소수'의 안건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일국양제의 사망, 일국일제 시대 도래"

중국은 홍콩을 대신해 입법을 강행, 23년전 약속한 일국양제 원칙을 어기고 일국일제(一國一制, 한 나라 한 체제)로 바꾸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일국양제' 하의 항인치항(港人治港,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대변되는 홍콩의 반자치 지위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홍콩보안법 시행 파문은 국제사회로 확산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홍콩의 종말'이라는 표현으로 보안법 시행에 따른 홍콩 미래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pxx1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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