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뉴스핌] 권지언 특파원 = 유럽연합(EU)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합의를 간신히 도출했지만, 순탄치 않았던 합의 과정은 유럽이 러시아보다 더 크고 시급한 위협을 마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0일(현지시각) EU 27개 회원국 지도자들은 올해 말까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약 90%까지 줄이기로 합의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무기에 쓰일 러시아의 자금줄을 끊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이날 막판 합의가 도출될 때까지 EU 회원국들이 보여준 모습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에 대한 단합된 규제 결의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각국의 경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임을 시사했다.
특히 이처럼 삐걱거리는 유럽의 상황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장기전으로 몰고가 오히려 러시아에 유리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유럽연합(EU)과 유럽 각국의 국기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유럽 '발등의 불' 따로 있다
이날 EU 정상들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일부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EU의 6번째 제재 패키지다.
이번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는 해상으로 수입되는 물량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EU가 러시아에서 사들이는 원유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트위터에 EU가 올해 말까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약 90%까지 줄일 것이라고 알렸다.
러시아에서 벨라루스를 지나 폴란드, 독일,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으로 이어지며, EU가 러시아에서 사들이는 원유의 3분의 1가량을 공급하는 통로인 드루즈바 송유관은 이번 제재에서 제외됐다.
EU 회원국 일부의 이견을 감안한 절충안이 나온 것인데,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바쁜 유럽 각국의 서로 다른 사정 때문에 러시아산 석유 금수 합의가 난항을 겪었다고 지적했다.
매체는 유럽 각국 지도부에게는 에너지 및 식량 가격을 비롯해 천정부지로 치솟은 물가를 잡는 일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잡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플레이션을 더 부추길 수 있는 러시아 석유 수입 금지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기에 합의안 도출에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또 표면적으로는 러시아로부터 우크라이나 영토를 지키는 일이 정치적 우선 과제이지만, 유럽이라는 단일 시장 내에서 각국이 '공평한'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슈라고 지적했다.
당장 이날 합의된 절충안은 러시아산 원유를 해상운송으로 수입해온 국가들에는 값비싼 비용을 초래하지만 헝가리와 같이 파이프라인으로 수입하는 국가들은 여전히 저렴한 러시아산 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경쟁 왜곡 비판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EU가 석유 인프라에 투입하기로 한 20억유로 투자 자금도 어떻게 나눠 가질지도 문제다.
하르키우 지역을 둘러보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로이터 뉴스핌] 2022.05.30 kwonjiun@newspim.com |
◆ EU 갈등에 속타는 우크라이나
EU 회원국 간 이러한 갈등이 깊어질수록 러시아와 장기전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유럽 각국이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조금이라도 덜 부담하기 위해 대립각을 세우는 사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정복 지역을 조금씩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 내년 말이면 경제적 비용과 우크라이나 고통이 심화되고 난민 문제까지 더해져 서방국 사이에서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의 평화 협정을 압박할 가능성도 커질 전망이다.
폴리티코는 우크라이나군과 무고한 시민들이 매일 목숨을 잃는 다급한 상황에서 유럽이 자국 이익 챙기기에 바쁘자 우크라이나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 우크라이나가 일부 영토를 양보해야 전쟁이 끝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러시아산 원유 금수 합의 발표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시 완전 금수 조치를 내리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과 우려를 드러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EU 회원국 지도자들이 완전 금수에 동의하지 못한 점을 두고 푸틴 대통령은 제재가 약해지는 신호로 볼 것"이라며 "유럽 국가들의 모든 분열은 끝나야 하고, 내분은 러시아가 유럽에 더 많은 압력을 가하도록 부추기기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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