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국들이 '경제 안보'를 내세우면서 WTO 체제하의 자유무역 체제가 끝나가고 있다. 이들은 원자재나 연료, 미래 산업을 위한 기술 등을 무기로 삼아 철저하게 '자국 중심주의'로 향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는 소재와 부품 수급이 어려워지는 '공급망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고, 이미 그런 조짐도 보이고 있다. 뉴스핌은 이번 기획을 통해 세계 경제 헤게모니 재편 상황에서 나타난 '공급망 위기'의 심각성과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서울=뉴스핌] 백진엽 선임기자 =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후 위기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모습이다. 이는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는 '공급망 리스크'가 되고 있다.
지난 7일 미국 정부는 중국으로의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하는 규제를 시행했다. 이후 반도체 장비 업체 KLA는 규제에 따라 중국 기업에 제품 공급을 중단하겠다며, 중국에 공장을 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대상에 포함했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부품 수급 차질 우려로 이어졌다. 다행이 미국 정부가 두 회사에 대해 1년간 유예하기로 하면서 한고비를 넘겼지만, 이는 주요국들의 정책 방향에 따라 국내 기업들의 공급망이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공급망 위기, 해법은] 글싣는 순서
1. 미·중 싸움에 등 터지려는 '한국 경제'
2. 中투자 막힌 삼성·SK 반도체...돌파구는
3. 현지 생산 아니면 차별...한국 전기차 대응은
4. "바이오도 미국이 다 하겠다"…'K바이오' 갈 길은
5. "정부, 관련 정보 빨리 수집해 기업과 공유해야"
미-중 패권 다툼으로 인해 생긴 산업 장벽은 이것만이 아니다. 미국은 지난 8월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업체가 10년간 중국 등에서 생산시설 신·증설 등을 포함한 투자를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 생산시설을 둔 우리 기업이 생산시설 확대 제한 등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인플레감축법(IRA)도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미국 내에서 생산하지 않는 전기차에 대해서는 세액공제 혜택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을 담아 국내 산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드러난 취지는 인플레이션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중국 배터리 및 전기차 산업을 견제하고, 관련 산업의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중국 역시 중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기차, 그리고 배터리 산업에 대한 공급망을 중국 위주로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
상황이 이러자 한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아 공급망으로 인한 위험 가능성이 큰 데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편에 서기도 힘든 처지이기 때문이다.
공급망이 불안해지면서 국내 산업이 흔들린 대표적 사례가 '요소수 사태'다. 지난해 11월 중국의 비료 품목 수출 통제 조치에서 촉발된 '요소수 품귀 사태'는 공급망 차질에 따른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공급망 리스크에 따른 국내 산업 불안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행의 '최근 글로벌 공급망 차질의 특징 및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보면 자동차 생산은 지난해 말 이후 다소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중국 봉쇄 조치로 '내부 전선 뭉치'(와이어링 하네스), 에어백 통제장치(ACU) 등 부품 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3월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건설업계는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유연탄(시멘트·레미콘 원료) 수급 불안정 등이 가세하면서 회복이 더디다. 유연탄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시멘트 가격이 급등하고 있고, 이에 레미콘 업체들은 공장 가동 중단까지 고려하면서 건설현장을 긴장시키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공급망 리스크로 EU가 중심이 되는 '기후위기 대응' 문제가 있다. '탄소세' '탄소국경세'로 대변되는 이 정책들은 완제품 뿐만 아리라 해당 제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부품이나 소재, 관련 장비 등의 '탄소 발자국'을 따져보겠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예컨대 완성품을 생산하는 A사의 경우 자체적으로는 RE100 달성 등으로 완제품은 문제가 없더라도, 부품을 납품받는 협력사가 탄소배출을 많이 할 경우 수출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형태다. 즉 수출기업들은 자신들의 사업장 뿐만 아니라 협력사의 온실가스 배출까지 관리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이같은 공급망 변화에 대해 이규석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미·중 패권경쟁이 글로벌 공급망과 산업 전반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으며, 그 영향이 국제질서 재편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세계 주요국들은 패권경쟁의 승패를 판가름할 열쇠를 기술로 판단하고, 기술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은 디지털 전환과 인구감소로 인해 과학기술인력의 질적·양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며 "기술인력 양성과 대기업·중소기업 기술거래 활성화 등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 국내 공급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jinebi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