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국들이 '경제 안보'를 내세우면서 WTO 체제하의 자유무역 체제가 끝나가고 있다. 이들은 원자재나 연료, 미래 산업을 위한 기술 등을 무기로 삼아 철저하게 '자국 중심주의'로 향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는 소재와 부품 수급이 어려워지는 '공급망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고, 이미 그런 조짐도 보이고 있다. 뉴스핌은 이번 기획을 통해 세계 경제 헤게모니 재편 상황에서 나타난 '공급망 위기'의 심각성과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서울=뉴스핌] 백진엽 선임기자 = 전기차. 운행 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이 화두인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유망받는 분야 중 하니다. 전기차 시장이 크면서 배터리 시장 역시 함께 성장하는 촉망받는 산업으로 꼽힌다.
그러다 보니 '경제안보',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해진 최근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은 반도체와 함께 주요 나라들이 앞다퉈 규제를 통해 자국 위주의 공급망 구축에 나서는 산업이기도 하다. 특히 전기차는 환경보호를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나라가 많은 만큼, 보조금 규정만 손보면 차별적 규제가 가능하다.
[공급망 위기, 해법은] 글싣는 순서
1. 미·중 싸움에 등 터지려는 '한국 경제'
2. 中투자 막힌 삼성·SK 반도체...돌파구는
3. 현지 생산 아니면 차별...한국 전기차 대응은
4. "바이오도 미국이 다 하겠다"…'K바이오' 갈 길은
5. "정부, 관련 정보 빨리 수집해 기업과 공유해야"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다. IRA에 따르면 미국에서 전기차 보조금 등 세제 혜택을 받으려면 배터리의 핵심광물 40%가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에서 채굴·가공돼야 한다. 이 비율은 2024년 50%, 2027년 80%로 높아질 예정이다. 이는 배터리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고, 배터리와 전기차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19일 정부와 업계 등에 따르면 비슷한 움직임이 EU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원자재법(RMA) 도입이다. EU는 지난달 14일 RMA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후, 내년 1분기 중 초안을 발표하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이 역시 원자재와 관련해 EU 중심의 탄탄한 공급망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업계에서는 RMA가 제2의 IRA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전부터 중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 자국 배터리 산업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업계 강자인 BYD와 CATL의 경우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세계 최고를 넘본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진= 현대차그룹] |
한국 자동차와 배터리 업계의 주요 시장인 미국, 중국, EU의 이런 움직임은 국내 기업들의 큰 부담이다. IRA와 관련해 한국 정부와 업계, 미국 상의 등이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고, 미국 정부도 이에 대해 고려중이라는 소식은 그나마 희소식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미국의 선심만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해당 시장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공급망과 생산기지를 다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공급망 다변화는 외부 요인에 의해 갑작스럽게 진행되다보니 부담이 되는 것이지, 안정적인 수급과 성장을 위해 기업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현재 기업들은 공급망 재편에 따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IRA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현대차는 미국 조지아 전기차 공장 착공을 앞당겼다. 당초에는 내년 상반기 착공에 들어가 2025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했는데,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발효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착공과 완공시기를 6개월 앞당겼다. 완공 예정 시기는 2024년 10월이다. 이와 함께 미국 정·재계 인사들과의 소통을 통해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세제 혜택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SK온은 최근 호주 '레이크 리소스'(Lake Resources)사 지분 10%를 투자하고, 친환경 고순도 리튬 총 23만톤을 장기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공급계약은 오는 2024년 4분기부터 시작해 최대 10년간이다. 이에 앞서 호주 '글로벌 리튬'(Global Lithium Resources)사와도 리튬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양해각서를 맺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캐나다 광물업체 3곳과 배터리 핵심 원자재인 리튬·코발트 공급 협약을 체결했다. 또 포스코홀딩스와 이차전지의 핵심 원자재인 리튬과 양·음극재 등 소재, 폐배터리를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삼성SDI 역시 소재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시장을 모니터링하면서 공급망을 관리, 점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지훈 한국무역협회 연구원은 "IRA 뿐만 아니라 ESG 기준 강화 등의 글로벌 추세에 따라 리튬의 높은 중국 의존도는 점점 불이익을 불러 올 수 있다"며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은 한국의 배터리 공급망의 근본적인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민·관의 긴밀한 협력하에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동맹국과의 자원외교를 통해 원자재 공급망을 다변화하여 환경 표준 및 원산지 기준 이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친환경 제련산업을 육성해 해외 미가공 원자재를 제련하는 기술과 역량을 키워 배터리 공급망에서 추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환경기준을 통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선제적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많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사실 IRA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너무 손 놓고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며 "그나마 사후적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한데, EU의 RMA는 법안 마련 시점인 지금부터 정부가 우리의 목소리를 많이 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해 윤창현 산업부 통상정책국장은 최근 열린 민관 합동 간담회에서 "RMA가 국제규범에 맞고 우리 기업에 차별적인 요소 없이 설계되도록 초기 단계부터 민관의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며 "산업계와 긴밀히 소통하는 한편 EU와도 관련 협의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jinebi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