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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14억의 영수 '황제' 총서기...①금수저 놓고 문혁 폭풍 속으로

기사등록 : 2022-10-2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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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방 마을 옌촨현 량자허 촌서 잔뼈 굵어
부친 고향 산베이는 뼈와 혼을 단련한 교실
암흑기 투철한 국가관 견지 10대 적극 분자

[베이징=뉴스핌] 최헌규 특파원 = 20기 1중전회를 통해 시진핑을 정점으로 하는 20기 공산당 지도부가 출범했다. 중국 정치가 정식으로 시진핑 총서기 3기 집권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자신의 10년(18기와 19기) 집권 성과와 100년래의 대변국이라는 국제 정세 급변을 내세워 두 기(10년 임기) 집권의 관례를 깨고 세번째 5년 집권에 나섰다.  일각에선 시 총서기가 마오쩌둥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으며 황제같은 종신 집권을 꿈꾼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민영수라는 말이 잦아진 것이 이런 관측을 뒷바침한다는 분석이다. 시진핑 시대들어 중국과 세계 관계의 메커니즘이 바뀌고 있다. 시진핑은 중국 정치판을 뒤흔들고 서구 중심으로 짜여진 세계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중국의 변화를 읽은데 시진핑은 핵심 키워드가 됐다. 시진핑은 누구인가. 뉴스핌은 공산당 20차 당대회를 통한 중국 새 리더십 출범을 계기로 다시 한번 시진핑을 조명해 본다.

 '산시성(陕西, 섬서)은 뿌리이고 옌안은 혼이며 옌촨은 나의 제2 고향이다. -시진핑'

중국 산시성의 공산당 옌안(延安) 유적지 옌촨(延川)현 양자허(梁家河)촌에 가면 촌 사무소 넓은 마당 정면에 시진핑 총서기겸 국가주석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의 연설문 한 대목이 대형 30미터가 넘는 대형 붉은 간판 위에 이렇게 적혀있다.

2021년 5월 초 뉴스핌 기자는 공산당 100주년과 절대 권력을 꿈꾸는 시진핑 총서기를 취재하기 위해 시 총서기의 원적지이면서 10대 청년 시절 시 총서기의 자취가 서려 있는 산시성 옌안과 옌촨 일대를 찾았다. 

옌촨현 양자허 촌 현지 안내원에 물어보니 시진핑 주석은 1993년 옌안에 한번 다녀갔고 총서기에 오른 뒤 2015년 2월 13일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또다시 옌안을 방문했다고 한다. 붉은 간판의 구호들은 이때 시진핑 주석이 강조한 얘기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시 총서기겸 국가주석이 산시를 뿌리라고 말한 것은 부친 시중쉰(習仲勛) 고향이 산시성 푸핑(富平)인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진다. 

[베이징=뉴스핌] 최헌규 특파원 = 시진핑 총서기가 10대 때인 문혁기에 하방돼 생활했던 산시(섬서)성 옌촨 량자허 촌의 황토 토굴방.  2022.10.23 chk@newspim.com

시중쉰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 산시성 북부(산베이, 陕北)에서 젊은 시절 공산 혁명 활동을 벌였고 마오쩌둥의 대장정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홍군 대장정의 도착점인 옌안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13년간(1935년 10월~1948년 3월) 주둔한 곳으로 중국 공산당이 혁명의 성지로 삼는 곳이다.

시진핑은 혁명원로 자재로서 금수저 신분이고 유년시절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한 순간에 그의 평안한 인생을 바꿔놨다. 시진핑은 문혁중인 1969년 1월 13일 15세 때 지식청년(知靑) 재교육 '차두이(插队, 하방)' 활동으로 산베이(陝西,산시성 이북) 지역 옌안시 옌촨(延川)현 량자허 마을로 하방돼 7년 동안 청년 시절을 보냈다. 시 주석이 옌안은 혼이고 옌촨은 제2 고향이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절 연휴 기간 중인 2021년 5월 2일 뉴스핌 기자는 공산당 창당 100주년과 14억 인민의 나라 '시진핑의 새로운 중국' 기획을 위해 옌안을 찾았다. 이날 샨시(陝西)성 옌안(延安)에는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옌안 100킬로 미터 동쪽 황하의 누런 물은 아주 세차게 굽이쳐 흘렀다. 옌안 시내에서 황하를 거쳐 동북 쪽을 향해 버스로 한시간 남짓 달리자 량자허(梁家河) 촌이라는 길 표지가 나온다.

옌촨현 량자허 촌은 문화혁명 시기 지식청년들의 상산하향(上山下鄕) 차두이(插隊, 하방, 지식 청년들이 산간 농촌에서 농민들과 생활하며 재교육과 함께 사상을 재무장함) 현장으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10대 때인 1969년~1975년 까지 7년 동안 생활했던 곳이다. 이때 문혁기간 대부분 혁명 간부들이 그랬듯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도 지방에 하방돼 곤욕을 치렀다.

'열다섯살 황토 지역(옌안시 옌촨현 량자허 촌)에 왔을 때 나는 갈피를 못잡고 방황했다. 22세 황토 지역을 떠날 때 인생 목표가 단단해졌고 자신감이 중만해졌다'. 시진핑 주석은 일찌기 량자허 촌에서의 청년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베이징=뉴스핌] 최헌규 특파원 =시진핑 총서기가 10대 때인 문혁기에 하방됐던 산시(섬서)성 옌촨 량자허 촌에 '옌촨은 나의 제 2고향'이라는 시 총서기의 말이 대형 구호로 나붙어 있다.     2022.10.23 chk@newspim.com

학교는 문을 닫고 방학도 아닌데 어린 학생들은 산으로 농촌으로 내려가 힘든 노동과 정신 개조에 참여해야 했다. 도시에 남은 학생들 역시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수렁속을 헤매야했다. 영화 '밝은 태양이 빛나던 시절'은 문화대혁명 당시 시진핑 또래 전후의 젊은 청년들의 방황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시진핑은 비슷한 중학생의 나이였지만 생각과 삶의 태도가 남달랐다. 그는 량자허 촌의 차두이 하방 생활 7년 도중 당과 국가와 인민을 위하는 열혈 청년으로 변신했고 20세 때인 1974년 마침내 공산당원이 됐다. 혁명 간부 부친이라는 배경도 한 몫했지만 무엇보다 긍정적인 관점으로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이겨낸 뚝심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평가다.

1970년대 시진핑과 같은 '차두이' 지식청년들은 그 옛날 13년간의 옌안시기(1935년~1948년) 홍군이 묶었던 것과 똑같은 황토 동굴 방에서 생활했다. 2021년 5월 기자가 량자허 촌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살펴봤을 때 동굴 방은 산속의 토굴과 하나도 다를바 없었다.

'자력갱생 고난분투' '양식절약 낭비반대'. 왠지 익숙한 구호다. 10대의 시진핑이 묶었던 옌촨 량자허의 황토 동굴 방에는 정면 침상 맡에 청년기 시진핑 주석의 량자허 시절 사진이 걸려있고 좌우 양쪽 황토벽에는 중미 갈등이 격화하는 요즘 중국인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이런 표어가 붙어있었다.

동굴방 유적지에는 시진핑이 메탄가스 신기술 보급에 기여했고 모든 과업에 적극분자로 평가 받았으며 그 공로로 1974년 1월 량자허 생산대대 당 지부 서기에 임명됐다고 적혀 있었다. 메탄가스 연구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주민들은 청년 시진핑이 밤 늦도록 책을 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베이징= 최헌규 특파원 chk@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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