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가 재임 시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즈음에 유럽 주요국 정상들과 나눈 대화를 폭로해 논란이다.
22일(현지시간) 케이블채널 CNN포르투갈 방송과 인터뷰한 존슨 전 총리는 "당시에 우리는 러시아가 대대전술단(BTG)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국가별로 매우 다른 시각을 갖고 있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포르투갈의 CNN 케이블 방송 'CNN포르투갈'과 인터뷰한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사진=유튜브 캡처] |
그는 유럽연합(EU) 3국이 러시아 침공 가능성에 상대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면서 "독일은 재앙이 될 일(러시아의 우크라 침공)이 발생한다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고 우크라가 포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했었다"고 발언했다.
여기서 독일은 올라프 숄츠 현 총리로 해석된다. 당시에 숄츠는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공한다면 우크라가 조기에 패전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어 존슨은 "나는 이 견해를 지지할 수 없었다. 매우 처참한 시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독일이 왜 그렇게 생각했고 느꼈는지는 이해가 간다"며 독일의 높은 대(對)러 에너지 의존도 등 "경제적인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독일은 러시아가 우크라를 칠 것이란 관측이 나온 올해 1월, 다소 형편없는 지원을 해 서방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대전차미사일과 드론 등 무기를 전폭 지원했을 당시 독일은 고작 군용 헬멧 5000개를 보냈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다음에는 무얼 보낼 생각이냐. 군용 베개냐"며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5월 독일은 그리스에 있는 구소련 탱크를 우크라로 인도하는 것은 중재하면서도 정작 우크라가 요청한 자국의 주력 전차 '레오파드-2'와 '마르더-1'을 지금도 지원하지 하지 않고 있어 체면치레조차 하지 않는 상황.
지난 9월 중순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 외교장관은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이냐?"고 공개 저격했고 당시 크리스틴 람브레트 독일 국방부 대변인은 "일방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나토 동맹국과 상의할 사안"이라며 "우리나라 방어가 필요할 때도 있을 텐데 모든 무기를 다 내줄 순 없지 않느냐"고 해 논란을 키웠다.
존슨이 언급한 두 번째 국가는 프랑스다. 존슨은 특정 정상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실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의 일화로 봐도 무방하다.
존슨은 "프랑스는 일이 벌어지기 막판까지 러시아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고 발언했다.
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다. 2022. 2. 7. [사진=로이터 뉴스핌] |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공하기 불과 몇 주 전인 지난 2월 7일 모스크바를 방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침공 계획이 있다면 실행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당시 마크롱은 푸틴으로부터 침공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었다고 밝혔는데 그로부터 한 달 도 채 되지 않아 푸틴이 '특별군사작전'을 선언하자 마크롱에게 있어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란 설명이다.
당시는 4월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으로 주요 외신은 마크롱의 모스크바 방문을 일종의 선거 운동이라고 진단했었다. 마크롱은 그 다음달인 3월에도 모스크바를 또 방문했는데 도이치벨레 등 유럽 언론은 "마크롱이 가서 이룬 것이 대체 무엇이냐"며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전쟁이 악화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존슨이 마지막으로 저격한 국가는 이탈리아다. 존슨은 당시 총리였던 마리오 드라기가 "우리는 러시아산 탄화수소 수입 의존도가 막대하기에 서방의 태세를 지원할 수 없다고 단언했었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존슨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조 바이든(미국 대통령) 등은 단순히 말해 우크라가 선택지가 없다고 했었다. 왜냐하면 이 남자(푸틴)와의 협상은 불가능하다. 그게 핵심 포인트"라며 바이든도 러시아의 침공 전 우크라가 승산이 없고 패전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폭로했다.
놀랍게도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공하자마자 지원을 망설였던 EU 국가들이 180도 태세 전환을 했다고 존슨은 전했다. 이어 그는 "EU는 훌륭히 해냈고 나의 모든 불안감을 떨쳐냈다. 나는 EU가 한 일에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통합했다"고 훈훈히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존슨의 뜬금없는 폭로에 저격당한 유럽국들은 발끈했다. 독일 정부의 슈테펜 헤베슈트라이트 대변인은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utterly nonsense)라며 "우리는 매우 재미있는 전직 총리가 항상 자신 만의 진실을 갖고 얘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날벼락을 맞은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아직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왼쪽부터)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사진=공식 프로필] |
◆ 존슨은 '왜' 주요국 정상을 저격했을까
존슨이 왜 그것도 포르투갈 케이블 방송 채널과 인터뷰에서 주요국 정상들을 정조준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존슨은 같은 인터뷰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의 "극강의 훌륭한 리더십"을 치켜세우며 "그는 매우 용감한 사나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전쟁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쓰여갔을 것"이라면서 "만일 우크라가 EU 회원국이 되기로 결정했다면 추진해야 한다. 우크라에도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것이 '힌트'가 된다면 존슨은 EU에 우크라의 회원 가입 승인 진행을 서두르라는 압박용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우크라는 러시아 침공 후인 지난 2월 28일 공식적으로 EU 가입을 요청했고, 우크라와 국경을 맞댄 구소련 국가 조지아와 몰도바도 잇따라 가입을 신청했다.
EU 회원국이 되기 위해서는 신청-공식 가입 후보국 지위 승인-정식 가입 협상-승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최종 승인 단계는 모든 EU 27개국의 의회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해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 예컨데 마지막으로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경우 가입 신청 후 10년이 걸려 지난 2013년에 공식 회원국이 됐다.
존슨은 재임 때도 우크라의 EU 가입을 강력히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는데 우크라 정부도 공식 트위터에 리즈 트러스 전 총리의 불명예 사임 후 존슨이 다시 총리가 돼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했을 만큼 '존슨 팬'이다.
국내 정치 관점에서 본다면 존슨의 '정치 생명 과시'도 있다. 지난달 치러진 영국 총선 때 존슨은 후보 등록에 필요한 하원의원 지지를 확보했지만 '당의 통합'을 위해 출마를 포기, 리시 수낵이 유일한 후보로 출마하면서 자동적으로 수낵이 총리가 됐다.
영국 매체들에 따르면 당시 존슨이 확보한 지지는 102명. 간발의 차이로 후보 출마 요건을 충족했는데 수낵의 경우 이에 2배에 해당하는 193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에 일각에서는 '파티게이트' 등 각종 스캔들로 불명예 사임한 존슨이 수낵과 결선 투표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에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가 왜 폭로전에 나선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재임 시절 자신의 겪었던 일화를 추가로 폭로할지 앞으로도 그의 입에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wonjc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