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 내 식량 사정이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는 가운데 노동신문이 "굶어 죽고 얼어 죽을지언정 절대로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자주, 자존의 정신"이라며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나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식량 부족 사태가 이어지는데도 외부지원 등을 거부한 채 버텨온 김정은 체제가 극한의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란 우려도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나온다.
노동신문은 14일 1면에 장문의 기사를 싣고 "역사에는 처음에는 독자성과 자립성을 운운하다가도 제국주의자들의 강권과 전횡 앞에 한 걸음, 두 걸음 양보하고 타협하던 나머지 굴종과 예속의 길로 굴러 떨어진 나라들이 한 둘이 아니다"며 자주⋅자존의 원칙을 강조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북한 농촌 지역의 추수하는 모습. 연출된 것으로 보이는 이런 장면과 달리 북한의 식량난은 심각한 상황이다. [사진=평양타임스] 2023.02.15 yjlee@newspim.com |
노동신문은 또 "아직은 사회주의 건설의 전면적 발전을 열어나가는 데서 극복해야 할 문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다"며 "그러나 그 어떤 힘도 자력갱생의 기치높이 전진하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고 우리를 질식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이런 보도가 주목받는 건 식량 문제 등을 둘러싸고 최근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 겨울 들어 식량 부족상황이 심화되고 특히 이달 들어 개성시와 평북 신의주⋅구성 등지에서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관측이 대북 소식통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정부 당국도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사와 함께 동사자 발생설까지 흘러나온다.
개성의 경우 굶어죽는 사람이 잇달아 나오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간부를 현지에 파견해 사태파악에 나섰다는 말까지 나온다.
대북 전문매체인 데일리NK는 14일 보도에서 "최근 신의주시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가족 전체가 허기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세대가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성시에서는 이달 초 가족 3명이 굶어 쓰러진 채로 발견됐는데, 7살짜리 아이의 경우 숨이 멎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사설이 제기된 지역이 북한에서는 먹고사는 형편이 나쁘지 않은 곳이란 점이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1년 6월 17일 노동당 제8기 3차 회의에서 식량 긴급 방출을 지시하는 특별명령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2023.02.06 yjlee@newspim.com |
아사 및 동사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번지는 상황에서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1면에 장문의 기사를 싣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을지언정..." 같은 표현을 쓰고, '질식'이나 '허리띠' 같은 단어를 동원해 긴장 수위를 높이자 정부 당국자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김정은이 2021년 6월 평양에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노동당 제8기 3차 회의를 열어 식량 긴급 방출을 지시하는 특별명령서를 공개했던 당시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수 북한연구소 소장은 15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강조하는 북한에서 노동신문의 문구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며 "쉬쉬하고 감춰봤자 상황만 악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위기를 드러내 알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신문은 "우리 공화국이 남들 같으면 열 백번도 주저앉고 지리멸렬되었을 극악한 봉쇄가 지속된 상황에서도 견디어 냈다"며 위기 극복을 주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는 식량부족 등 어려움이 미국의 대북제재 때문이란 북한 당국의 주장이 깔려있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선 핵과 미사일에 올인하면서 제재를 자초한 김정은을 향해 볼멘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통일부 당국자는 "식량난으로 인한 불만이 김정은에게 쏠리는 걸 막기 위해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를 통한 선전⋅선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8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북한군 창건 75주년 열병식. [사진=조선중앙통신] 2023.02.09 yjlee@newspim.com |
노동신문의 글은 김정은 체제 군사노선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문은 "치열한 사회주의 수호전에서 연전연승을 이룩할 수 있은 것도 허리띠를 조이면서 자위의 보루를 억척으로 다져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 당이 마련해준 무적의 군력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민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에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는 여러 나라 피난민들의 비참한 처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라면서 노동당과 김정은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촉구했다.
이어 노동신문은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북한군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언급한 뒤 "무적필승의 막강한 군력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 인민은 필승의 신심을 백배하며 광활한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북한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수 개월간 군 병력과 장비는 물론 주민⋅학생 등을 동원해 군사 퍼레이드 준비에 매달려온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내부 식량사정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식량증산을 강조하는 북한의 선전포스터. [사진=조선중앙통신] 2023.02.15 yjlee@newspim.com |
북한은 이달 하순 식량 문제를 단일 의제로 노동당 전원회의를 소집할 것임을 예고한 상태다.
이 회의 개최 방침을 밝힌 노동당 정치국의 지난 5일자 결정서는 "농업의 올바른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당면한 농사에 필요한 해당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절박한 초미의 과제"라고 밝혀 사정이 녹록지 않음을 내비쳤다.
김영수 소장은 "전원회의 소집이나 노동신문의 글은 '당도 우리 어려움을 알고 있구나'라는 시그널을 주민들에게 주려는 의도도 깔려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의 불만을 누그러트리고 노동당과 김정은에 대한 충성 유도와 체제결집을 꾀하려 한다는 것이다.
주요 식량생산 지역이나 모범적인 협동농장 등을 중심으로 곡물증산을 위한 분위기 띄우기에 나선 상황도 감지된다.
노동신문은 15일 보도에서 하루 전 황북 사리원시 미곡리문화회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출생(2.16) 81주년을 맞아 농업 근로자들과 농근맹원들의 경축모임이 열린 사실을 전하면서 "농사를 과학·기술적으로 지어 당이 제시한 알곡 생산목표를 기어이 점령하며 축산물과 과일, 온실 남새와 버섯 생산을 늘려 인민들이 실지 덕을 보게 하자"는 결의가 이뤄진 사실을 전했다.
통일부는 북한 식량 상황과 관련해 지난 6일 구병삼 대변인의 브리핑을 통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2022년도에 451만t이었고 이는 2021년에 비해 3.8% 정도 감소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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