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서울신학대학교 실용음악과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전공하는 탈북민 김엘인 씨는 늦깎이 대학생이다.
불혹의 나이에 막내 동생이나 조카뻘인 친구들과 공부하면서 꿈을 키우고 있다.
[서울=뉴스핌] 서울신학대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탈북민 출신 늦깎이 대학생 김엘인 씨. [사진=남북하나재단] 2024.04.05 |
전문 연주예술인으로 음악교사로 자리하는 미래를 그리며 하루하루 기량을 쌓고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꿈은 13살 소녀 시절 고향인 회령의 한 중학교 음악반 구석에 놓여있던 통키타를 가슴에 품고 행복해하던 그 시간부터 싹을 틔웠다.
회령담배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벌이가 변변치 않았다.
늘 가난과 배고픔이 함께했고 맏딸이던 김 씨는 동생들까지 챙겨야 하는 고단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음악이었다.
인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악기 연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음악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싶었지만, 악기를 살 돈이 없어 포기했다.
결국 음악실에 있는 베이스기타를 선택해 열심히 배워 마침내 연주하게 됐다.
김 씨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보위부 선동원으로 활동했다.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기타 연주도 하고, 구호도 외치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서울=뉴스핌] 키타와 아코디온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탈북민 김엘인 씨는 실용음악을 전공해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4.04.05 |
하지만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현실은 꿈과 거리가 있었다.
음악대학은커녕 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해야만 했고, 중국과 거래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김 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중국에 먼 친척이 살고 있다고 들었던 터라, 중국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어요.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탈북을 결심했고 2006년 무사히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듬해 한국에 입국한 그는 운 좋게 종합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게 됐지만 녹록치 않았고 결국 한 달 만에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실적을 내지 못한 당연한 결과지만, 서러움에 울면서 버스도 타지 않고 1시간이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 새 직원이 올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까지라도 한번 해보자, 안되면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그냥 포기할 수만은 없어."
화장품 성분 설명서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닥치는 대로 열심히 외웠다.
다른 직원들이 고객에게 제품에 관해 설명하는 용어들과 내용을 작은 수첩에 꼼꼼히 메모하고 그걸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고객이 김 씨에게 기초화장품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자신감을 가지고 성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고 결국 여러 세트를 판매할 수 있었다.
첫 판매실적을 이룬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사장은 그녀를 신뢰하게 됐고, 그 후로 6년이나 일했다.
화장품 매장에서 베테랑 판매직원이 되어가던 무렵 한국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딸을 낳아 키우게 됐다.
통일부의 학교 통일 강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다시 갖게됐다.
북한에서 배우지 못했던 아코디언도 배우게 됐다.
그리고 2년 전 한국신학대 실용음악과에 실력을 인정받아 당당히 합격했다.
기타를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면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통일이 된다면 고향의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겠다는 꿈도 있다.
어려움이 적지 않겠지만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김 씨의 집에 있는 작은 칠판에는 수강 일정과 과제 제출 기일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는 "앞으로 이 칠판에 적힌 것들이 하나하나 지워지는 만큼 제 삶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마중하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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