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증원을 둘러싼 의정(醫政) 갈등이 3개월 가량 장기화되면서 의료계에 변화의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중증환자나 응급환자들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전공의들이 이탈한 3차 상급종합병원들은 진료가 차질을 빚으면서 경영이 악화되고 있다. 반면 개원의, 2차 종합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간호사들의 역할은 법적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의정 갈등의 장기화로 나타난 명암(明暗)을 살펴본다.
[서울=뉴스핌] 노연경 기자 = 지난 2월 6일 정부가 의과대학 정원 증원을 발표한 이후 3개월여 지났다. 그간 의정갈등을 인해 상당한 사회적 손실이 발생했지만, 의정갈등이 암(暗)만 남긴 것은 아니다.
의정갈등으로 인한 '비정상'이 오히려 정상화되는 모양새도 보이고 있다. 바로 의료전달체계다. 의료전달체계는 쉽게 말해 '적정 진료'를 일컫는다. 이는 적정인에게 적소에서 적정 진료를 받는 제도를 뜻한다.
[의정갈등 명암] 글싣는 순서
1. 제약·바이오, 실적 타격 불가피…임상도 줄줄이 연기
2. 중증환자만 받는 대학병원…진료체계 긍정 신호?
3. 병원 문턱 높아지자 환자 수 감소…건강보험 재정 개선 효과
4. 최대 피해자는 환자…응급실 뺑뺑이·진료지연 '악순환'
5. 대형종합병원 경영 악화, 관련 종사자 무급휴가 권고 등 '불안'
6. 비대면·원격 진료 '탄력'…법제화 기대감
7. 진료지원간호사(PA) 법적근거 마련될까…보호 방안은
8. 尹-李 공감대 형성했지만…관련 입법 '난항'
의료기관은 병상 수와 진료 과목 수 등을 기준으로 1차에서 3차로 나뉜다. 1차 의료기관은 의원급 의료기관으로 병상이 30개 미만이다. 통상 한 가지 진료과로 구성된다. 흔히 동네에 있는 의원급 병원이 1차 의료기관에 해당한다.
2차 병원은 병원과 종합병원급 의료기관으로 병상을 30개 이상 500개 미만이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중앙보훈병원, 성심의료재단강동성심병원, 서울의료원 등이다.
3차 병원은 상급 종합병원급 의료기관으로 병상을 500개 이상 보유하고 진료과목이 20개 이상으로 모든 진료과목에 전문의가 존재해야 한다.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등이 해당한다.
의정갈등은 1,2차 병원보다 3차 병원에 타격을 줬다. 3차 병원은 인력구조 대부분을 수련받으러 온 전공의에게 의존해왔다. 의대생은 졸업하고 나면 전공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수련병원으로 지정된 곳에서 수련받아야 한다.
흔히 '빅5'라고 말하는 3차 병원의 대표격인 서울성모·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대·서울아산병원의 전공의 비율은 평균 38.5%다. 의사 인력의 40% 수준을 전공의에게 의존했던 기형적인 구조로 인해 이들 병원의 병상 가동률은 급격히 낮아졌다.
주요 빅5 병원은 수술 건수를 평소 대비 절반 수준으로 조정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기준 상급 종합병원 일반 입원환자는 2만4085명으로 전공의 집단행동 이전인 2월 첫 주 평시 대비 27% 감소했다.
다만 일반 입원환자와 달리 중환자실 입원환자 수는 이보다 적은 차이를 보인다. 지난달 25일 기준 상급 종합병원 중환자실 입원환자는 2871명으로 전주 대비 0.7% 감소했지만, 2월 첫 주의 87% 수준이다.
수술 건수가 줄어든 결과 일반 입원환자는 전보다 적어졌지만, 중환자실 입원환자 수는 비교적 전공의 이탈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의정갈등이 '의료전달체계'를 정상 작동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서울=뉴스핌] 최지환 기자 =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2024.03.25 choipix16@newspim.com |
1,2차 의료기관에서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환자들이 3차 병원에 몰리면서 되려 3차 병원에서 진료받아야 하는 위중증 환자들이 밀리다가 의정갈등으로 인해 3차 병원이 환자를 가려받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기영 분당서울대병원 병리과 교수는 뉴스핌TV KYD방송에서 "원칙적으로 1차 의료기관, 2차 의료기관을 거쳐 3차 의료기관으로 가게 돼 있다"며 "그러나 1차 의원에서 쉽게 상급병원 진료 의뢰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3차 의료기관의 접근성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최고로 높다"고 지적했다.
의료계 뿐아니라 의료서비스 이용자 측도 이 부분에 대해선 공감한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뉴스핌TV KYD방송을 통해 "국내 의료전달체계가 소비자 입장에서는 언뜻 보면 굉장히 장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한계를 갖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해 상급 종합병원을 중증 환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는 게 의료 소비자들에게 훨씬 더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라며 "그래서 지금까지 자유롭게 이용했던 의료 소비자 입장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ykno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