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한태봉 전문기자 = 퇴직연금 시장에서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각하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란 거래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다른 쪽보다 해당 상품에 대한 정보가 더 많은 상태를 뜻한다. 퇴직연금으로 투자 가능한 상품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가입자 간 수익률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다.
투자상품 지식이 높은 가입자는 미국 S&P500이나 나스닥100 ETF를 통해 지난 몇 년간 2배의 수익률을 달성한 경우도 흔하다. 반면 '원리금 보장'에만 집착해 연 3%에 불과한 수익률에 만족하는 가입자도 상당하다. 심지어 중국 관련 ETF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가 아직도 손실 중인 투자자도 수두룩하다.
한 퇴직연금 가입자는 "퇴직연금은 용어도 어렵고 상품 종류가 워낙 다양해 가장 익숙하고 안전한 예금 상품을 선택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또 다른 가입자는 "미국 주식이 좋다고 해서 예금으로 가입한 퇴직연금을 미국 ETF로 옮기려고 계속 타이밍을 보고 있는데 달러도 계속 강세고 미국 주식도 사상 최고치라 교체를 망설이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국 퇴직연금도 투자상품의 일종이므로 상당한 투자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 장벽이다.
◆ 형식적인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 개선돼야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퇴직 후에도 안정적인 노후 소득을 유지할 목적으로 도입됐다. 따라서 퇴직연금을 어떻게 잘 운용하느냐가 노후대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심각한 건 아직 본인 회사의 퇴직연금 제도가 DB형(확정급여형)인지 DC형(확정기여형)인지 용어조차 제대로 모르는 가입자도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정상적인 본인의 퇴직연금 운용 자체가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가입자 교육이 절실하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퇴직연금 교육은 한마디로 부실하다.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에 의거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회사(고용주)는 가입자에게 매년 1회 이상 퇴직연금 교육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 교육이 상당히 형식적이다.
만약 회사(고용주)가 은행, 증권, 보험사 등의 퇴직연금사업자와 계약 후 교육을 위탁하면 최초 1회의 집합교육이 진행된다. 이후에는 매년 온라인이나 이메일 교육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이마저도 실무에 바쁜 직장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는 어렵다.
또 이런 형식적인 교육은 지루하고 재미 없는 DB, DC 제도 설명과 세제혜택만 설명하다가 끝난다. 실제 구체적인 상품 안내까지 진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퇴직연금 가입자 간 정보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이유다.
◆ 퇴직연금은 단기 수익률보다 장기 수익률 중요
이러다 보니 직장인 스스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본인의 퇴직연금 계좌에 어떤 상품이 들어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다. 반면 퇴직연금에 일찍 눈을 뜬 직장인들은 적극적인 운용전략으로 상당한 수익을 본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2023년말 기준 지난 5년간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연 환산 수익률은 2.12%인데 반해 '실적배당형 상품'은 4.18%를 기록했다. 두 가지 유형의 수익률 차이가 연간 2.06%에 달한다.
게다가 2024년은 글로벌 증시 호황이라 수익률 격차가 더 확연하다. 올해만큼은 실적배당형 상품을 선택하지 않은 가입자들에게는 아쉬운 한 해다.
2024년 9월말 기준 적립금 상위 5개 은행(신한은행, KB국민은행, 하나은행, IBK기업은행, 우리은행)의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단순평균 수익률은 시사점이 높다. 먼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최근 1년 수익률은 3.6%에 불과하다. 반면 실적 배당 상품의 수익률은 13.3%다. 격차가 무려 9.7%에 달한다.
이렇게 최근 1년 수익률만 살펴보면 원리금 보장상품에 비해 실적배당 상품이 우월해 보인다. 하지만 심각한 폭락을 겪었던 2022년 수익률이 포함된 최근 3년 수익률 살펴보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실적배당 상품 단순평균 수익률은 0.7%에 불과한 데 비해 원리금 보장 상품 수익률은 2.3%로 1.6%포인트나 더 높다.
반면 기간을 더 길게 5년으로 늘리면 수익률은 다시 역전된다. 원리금 보장상품의 5년 단순평균 수익률은 2.1%로 실적배당 상품 4.2%의 절반 수준이다.
결국 실적 배당 상품의 장기 수익률이 원리금보장 상품보다 더 높지만 3년 이내의 짧은 기간에는 변수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24년 9월말 기준 적립금 상위 5개 증권사(미래에셋증권, 현대차증권,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NH투자증권)의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단순평균 수익률 역시 다르지 않다. 최근 1년 원리금 보장 상품 수익률은 4.3%, 실적배당 상품 수익률은 13.1%다. 5년 기준으로도 역시 실적 배당형이 4.6%를 기록해 더 높다.
퇴직연금은 최소 20~30년 이상 운용해야 하는 장기상품이다. 연 1%의 수익률 격차도 복리효과로 30년 뒤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하물며 지금같이 예금상품과 투자상품 수익률 격차가 매년 2~3% 이상 벌어지게 되면 은퇴 후 퇴직자가 수령하는 연금 격차는 엄청나게 커질 수밖에 없다. 소홀히 다뤄지는 퇴직연금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 고용주 관심 중요…정보격차 해소 앞장서야
퇴직연금 DC형(확정기여형)은 가입자 개개인이 직접 본인의 퇴직연금 안에 들어갈 금융상품을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가입자 간 심각한 정보격차를 해소하려면 회사(고용주)가 근로자들의 퇴직연금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은행, 증권, 보험 등의 퇴직연금 사업자는 계약 후에도 회사(고용주)가 요청 시에는 퇴직연금 운용 상품 관련 세미나를 진행해 준다. 더 적극적으로는 특정일을 정해 부스를 운용하며 가입자 간 1대1 상담을 지원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입자들이 실질적인 퇴직연금 운용전략을 교육받을 수 있게 앞장서서 움직이는 회사(고용주)는 많지 않다. 업무시간에 교육을 진행하면 회사 업무에 지장이 있으니 각자가 알아서 운용상품을 선택하라는 입장이다.
또 은행, 증권, 보험 등의 퇴직연금 사업자 입장에서도 종업원수가 적은 회사의 운용 상품 세미나 요청까지 지원하기에는 인력 부담이 크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특정 회사가 운용상품 관련 세미나를 요청할 경우 웬만하면 진행해 준다. 하지만 요청이 몰릴 경우 인력 부담이 크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고용주 외에도 가입자 스스로가 퇴직연금에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오프라인 대신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서도 상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주요 퇴직연금 사업자 중에는 온라인 '줌' 등을 활용해 상품설명이나 세미나를 진행하는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가입자 중 상당수가 아직도 자신의 퇴직연금을 어떻게 운용할지 방향을 못 잡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전히 원리금 보장상품 선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2023년말 기준 무려 87.2%인 333조원이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운용 중이다.
그나마 증권사(금투)의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이 26.7%로 가장 높다. 은행은 9.9%, 생명보험은 7.6%, 손해보험은 1.4%로 한 자릿수를 기록했다.
◆ 퇴직연금 이전제 활용해 적극적 운용 나서야
이런 이유로 정부는 10월말부터 도입하는 '퇴직연금 실물 이전제'로 수익률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가입자들이 예금 등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서 벗어나 미국주식 ETF 등의 '실적 배당형 상품'으로 갈아타는 촉매제가 될 거라는 분석이다.
그런데 회사별로는 총 몇 개의 퇴직연금 사업자와 계약되어 있을까? 보통 은행, 증권, 보험 업권별로 각각 1개씩 총 3개의 사업자와 계약을 체결한 경우가 가장 흔하다. DC 상품의 경우 회사와 계약된 사업자 간에만 퇴직연금 이전이 가능하다.
만약 가입자가 퇴직연금 이전을 원할 경우 회사 내에서 퇴직연금 업무를 담당하는 인사팀이나 재무팀에 신청하면 된다. 그런데 퇴직연금 이전업무를 실시간으로 365일 열어 놓는 회사는 드물다. 업무 과부하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반년에 1회 또는 1년에 1회 특정기간을 정해 퇴직연금 이전을 신청 받는 경우가 제일 흔하다. 따라서 퇴직연금 실물이전을 원하는 가입자는 회사 내부의 퇴직연금 관련 공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이전 가능 상품은 특정금전신탁 형태의 원리금보장상품(예금, GIC, ELB, DLB 등)과 공모펀드(MMF 제외), ETF 등이다. 다만 이관회사와 수관회사에서 동일 상품 라인업을 제공해야 실물이전이 가능하다.
이전 불가 상품으로는 퇴직연금 사업자의 자체 상품(디폴트옵션), 지분증권, 리츠, 사모펀드, ELF, 파생결합증권, RP, MMF, 종금사 발행어음 등이다.
퇴직연금 DC형(확정기여형)과 달리 IRP(개인형 퇴직연금)는 소속회사와 상관 없이 언제든 모든 금융기관으로 이전이 가능하다.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신청 가능하다. 이전 절차가 간편한 만큼 금융기관 사이에서도 IRP 이전 관련 사전마케팅이 치열하다.
◆ 증권사 ETF 라인업 탄탄…은행, 보험 가입자 들썩
실제 은행과 보험사의 퇴직연금 예금(만기 1년~3년) 가입자 중 일부는 이번 제도 도입에 따라 ETF 라인업이 풍부한 증권사로의 이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원리금 보장 상품 라인업은 은행이 탄탄하다. 하지만 실적 배당형 상품은 증권사가 더 다양하다.
특히 최근 대세로 떠 오른 ETF 상품 라인업은 은행보다 증권사가 월등히 많다. 은행은 증권사 라인업의 3분의1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고객이 퇴직연금계좌 안에 ETF를 편입할 때 증권사는 실시간으로 ETF 매수가 가능하다.
반면 은행은 각 은행별 시스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빨라도 15분 지연된 가격으로 ETF 매매가 체결된다. 따라서 실시간 ETF 매매를 원하는 고객에게는 은행 시스템이 불편하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증권사로 옮기려는 고객들의 수요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퇴직연금 가입자 간 수익률 격차는 심각하다. 노후 연금의 허리 역할을 하는 퇴직연금 수익률을 연 1%라도 끌어올려야 20~30년 뒤에 편안한 은퇴가 가능하다. 유명무실한 퇴직연금 교육의 개선이 절실한 이유다. 10월말부터 도입되는 '퇴직연금 실물 이전제'가 변화의 시작이다.
③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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