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지난 27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정권이 지속될 수 있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로 몰린 것은 한·일 관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일본이 당분간 국내 정치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외교에 손을 쓸 겨를이 없다는 점은 한국에도 좋은 일은 아니다.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정파를 초월한 지지가 있기 때문에 이번 선거 결과로 이에 역행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시바 내각은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각 파벌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총리 퇴진론'을 가라앉히는 데 주력해야 할 처지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를 포함한 대외정책은 국내정치에 밀려 후순위로 처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27일 일본 자민당 본부에서 언론 인터뷰하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
일본이 외교에 정치적 자산을 쏟을 겨를이 없기 때문에 한·일 관계는 당분간 현재 상태에서 '정지'될 가능성이 높다.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 등을 과감히 양보하고 한·일 관계 개선의 기초를 만든 윤석열 정부는 이시바 내각 출범 이후 일본이 '물컵의 나머지 절반'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번 선거 결과로 이 같은 기대가 충족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일 취임한 이시바 총리는 중의원을 조기 해산하는 승부수를 띄우고 이번 선거에 임했다.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이번 선거는 사실상 자신의 신임 투표에서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시바 총리가 당장 퇴진을 면한다고 해도 리더십에 커다란 타격은 불가피하다.
특히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 내에서 보기 드문 '한·일 관계 유화파'라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은 한·일 관계에 긍정적일 수 없다. 이시바 총리가 당내 강경파를 비롯한 각 파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일 과거사 문제 등에 소신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일본 새 내각 출범과 함께 일본 정부가 한·일 관계에서 전향적 태도를 보이거나 대담한 변화를 추진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이번 선거 결과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 동력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일은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다양한 협력 사업을 구상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한·일 관계의 기초를 구축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기조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논의의 속도와 폭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현재 한·일 간 최대 현안인 '사도광산 조선인 희생자 추모식'과 관련된 논의도 속도를 내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역사 문제 등 한·일 관계와 직결된 사안은 일본 정부의 지지율에 큰 영향을 주는 변수이기 때문에 곤경에 빠진 이시바 내각이 한·일 관계 현안에 유연해지기 어렵다"면서 "당분간은 한·일 관계의 빠른 진전보다 현상 유지에 방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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