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홍규 기자 = 골드만삭스는 대형 기술주의 성장세가 전력·통신·원자재 등 물리적 자산에 구조적으로 종속되는 국면이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이 종속 관계가 오랫동안 외면받던 실물 관련 업종의 투자수익률을 되살리는 한편 자금 흐름의 방향 자체도 전환시키고 있다고 봤다.
◆10년 투자 공백
종속 구조의 배경은 AI 기술의 물리적 전제 조건에 있다. 이른바 하이퍼스케일러(아마존·아라파벳·마이크로소프트·메타·오라클)의 올해 AI 설비투자 전망치는 6590억달러로 전년 대비 60% 증가할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투자가 실현되려면 대규모 데이터센터, 그리고 데이터센터를 가동할 전력·냉각·통신 설비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이에 대해 골드만삭스의 피터 오펜하이머 글로벌 주식 전략가가 이끄는 팀은 보고서에서 인터넷 상용화 25년 만에 처음으로 기술 성장의 전망이 물리적 자산에 의해 제약받는 국면이 형성됐다고 평가했다. 기술주의 성장 천장이 알고리즘이 아닌 물리적 설비의 공급 속도로 옮겨갔다고 본 셈이다.
문제는 이 물리적 인프라를 공급할 업종들의 투자 여력이 장기간 고갈돼 있었다는 점이다. 유틸리티·통신·원자재 업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설비과잉과 수익률 저하 현상에 시달리며 설비투자를 대폭 축소해왔다. 10년 넘게 누적된 투자 공백 탓에 AI 수요가 급증하는 현 시점에서 물리적 인프라의 공급 여력은 현저히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골드만삭스의 판단이다.
◆자금흐름 전환
투자 공백에서 비롯된 수급 불균형은 실물 업종의 수익성 회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선진시장 유틸리티·통신·원자재 생산업체의 매출액 대비 설비투자 비율은 일제히 상승 전환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해당 업체들이 투자 재개의 경제적 타당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여기에 각국의 국방비 확대에 따른 방산 설비투자까지 겹치면서 실물 인프라로의 자금 유입이 이중으로 가속되고 있다.
실물 인프라로의 자금 유입은 글로벌 주식시장 성과에도 반영되고 있다. 선진시장에서는 유틸리티·통신 등 구경제 업종이 AI 설비투자의 직접적 수혜를 누리면서 유럽 주가지수 STOXX600과 일본 토픽스 성과가 작년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미국 S&P500을 웃돌고 있다. 또 원자재 수요 확대의 파급은 관련 생산국 비중이 높은 신흥시장으로도 이어져 MSCI 신흥시장 주가지수의 성과를 끌어올렸다.
자금 이동을 가속하는 또다른 요인으로는 미국 기술주 자체의 수익률 둔화가 언급됐다. 미국 대형 기술주 7곳을 뜻하는 M7 주식의 연간 투자 수익률은 2023년 75%, 2024년 약 50%, 작년 25% 미만으로 매년 둔화했다. M7 종목 간 수익률 격차도 뚜렷해졌고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번성했던 소프트웨어 업종 주가가 급락하면서 기술주 전체의 수익률 저하 현상이 뚜렷해졌다.
◆재평가, 실적으로 확인
골드만삭스는 미국 기술주 수익률 둔화와 실물 업종의 수익성 회복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가치주에 대한 재평가도 확산되고 있다고 봤다. 현재 미국·유럽·일본·신흥시장 전반에서 성장주 대비 가치주의 할인폭(포워드 PER 기준)이 축소되고 있다고 했다. 또 과거 장기간 저평가 상태가 고착돼 투자자의 외면을 받아온 이른바 '가치 함정' 종목군 가운데 현금흐름 확대와 배당·자사주 매입 확대를 통해 '진짜 가치 창출자'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재평가를 떠받치는 실적 기반도 확인되고 있다. 미국을 보면 현재까지 발표된 작년 4분기 실적에서 S&P 500 기업의 이익 증가율은 12%를 상회해 시장 컨센서스를 5%포인트 웃돌았고 5개 분기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이어갔다. 주목할 점은 이 성장이 더 이상 대형 기술주에 의해서만 견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S&P 500 구성 기업의 이익 증가율을 중앙값 기준으로 봐도 9%에 달했는데 이는 소수의 대형주가 전체 수치를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다수의 기업이 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골드만삭스는 또 애널리스트들이 1분기부터 올해 연간 실적 전망을 상향 조정하고 있다고 주목했다. 통상 애널리스트들은 전년도 말에 다음 해 연간 실적 전망치를 세운 뒤 1분기를 지나며 현실에 맞춰 전망치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는데, 올해는 반대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추세는 신흥시장에서 특히 뚜렷한 것으로 파악됐다.
실적 전망의 상향 흐름이 미국을 넘어 신흥시장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골드만삭스가 보고서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미국 기술주 편중이라는 오랜 배분 관성에서 벗어나 지역·섹터·스타일 간 다변화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 과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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