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뉴스핌] 박정우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일(현지시간) 쿠바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로 평가받아 온 라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을 전격 기소했다. 베네수엘라에 이어 쿠바 정권을 겨냥한 압박 수위를 한층 끌어올린 조치로, 쿠바 정부는 "군사적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미 플로리다 남부연방지검(마이애미)은 이날 카스트로 전 의장을 살인, 미국 시민 살해 공모, 항공기 파괴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수사는 쿠바계 검사인 제이슨 레딩 키뇨네스가 지휘하고 있다. 기소 내용은 카스트로가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던 1996년 2월, 쿠바 공군이 미국에 기반을 둔 민간단체 '구조를 위한 형제들(Brothers to the Rescue)' 소속 경비행기 2대를 격추한 사건과 관련돼 있다. 이 사건으로 쿠바계 망명자 공동체에 속한 미국 시민 3명과 영주권자 1명 등 4명이 사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번 기소는 미국의 경제 제재 속에 심각한 전력난 등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쿠바 정부에 정치·경제적 양보를 압박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토드 블랜치 미 법무장관 대행은 마이애미 프리덤 타워에서 직접 기소 사실을 발표하며 "미국 정부는 하늘에서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베네수엘라 정권을 상대로 취해온 접근법과 유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은 지난 1월 군사 행동 이후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겨냥해 형사 기소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압박을 강화한 바 있다. 브라이언 폰세카 플로리다국제대 교수는 "미국이 경제·정치적 압박을 넘어서는 수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라며 "베네수엘라와 쿠바에 적용되는 접근 방식의 유형과 순서에 유사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기소가 협상 국면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쿠바 지도부와 군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양보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호르헤 카스타녜다 전 멕시코 외무장관은 "카스트로를 넘겨주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양보는 쿠바로서는 수용 불가능하다"며 "기소가 오히려 강경 대응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카스트로 전 의장이 고령(95세)인 데다 쿠바에 체류 중인 점을 고려할 때, 실제로 신병이 확보돼 미국에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다. 이번 기소가 쿠바 정권에 대한 상징적·정치적 압박 성격이 더 크다는 분석이다.
쿠바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이번 기소를 "법적 근거가 결여된 정치적 책략"이라고 비판하며,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쿠바는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았으며, 당시 조치는 반복된 영공 침범에 대응한 정당방위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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