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고인원 기자= 세계 증시를 주도하던 한국 증시가 불과 몇 주 만에 급격한 약세장에 진입했다. 올해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가파르게 상승했던 코스피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AI 회의론과 차익실현 매물이 확산하면서 지난달 기록한 사상 최고치에서 20% 넘게 급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코스피 시가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극단적인 반도체 쏠림 현상도 시장의 하락폭을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미국 CNBC는 최근 급락이 AI 수요나 반도체 업황의 근본적인 악화보다는 과도하게 높아진 밸류에이션과 투자 쏠림을 해소하는 과정에 가깝다고 전문가들을 인용해 분석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과 견조한 기업 실적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이번 조정을 AI 상승 사이클의 종료가 아닌 '건전한 재조정'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금융정보업체 LSEG에 따르면 코스피는 8일 5% 넘게 급락하며 지난 6월 19일 기록한 사상 최고치보다 20% 이상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통상 주가가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하면 약세장에 진입한 것으로 본다. 코스피는 하루 뒤인 9일 변동성 장세 속에서 소폭 반등했다.
에머캐피털의 마니시 레이차우두리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한국 증시의 급락은 글로벌 투자자들의 AI에 대한 회의론이 커진 가운데 극단적인 시장 집중 현상까지 겹친 결과"라고 분석했다.
◆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코스피 절반…AI 쏠림의 역풍
이번 급락은 올해 한국 증시 상승을 이끌었던 AI 투자 열풍이 동시에 시장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에머캐피털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어섰다. 두 반도체 기업의 주가 상승은 코스피를 세계 최고 수준의 상승 시장으로 끌어올렸지만 AI 투자심리가 흔들리자 지수 전체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피보나치애셋매니지먼트글로벌의 정인윤 창립자는 "이번 조정은 기업의 펀더멘털 악화보다 투자자들의 과도한 포지션에 따른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강력한 상승세를 거치면서 한국 증시는 전 세계에서 투자자들의 자금이 가장 과도하게 몰린 AI 투자처 가운데 하나가 됐다"며 "차익실현을 촉발하는 데 큰 충격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경제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기업들의 실적 전망 상향 흐름이 둔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키웠다.
다만 정 창립자는 최근 코스피 급락을 "시장 전망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건전한 재조정"이라고 평가했다.
◆ "금융의 게임화"…개인·레버리지 자금이 변동성 키워
최근 한국 증시의 급격한 등락은 금융시장의 투자 방식이 변화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KB금융그룹의 피터 김 글로벌 투자전략가는 "금융의 게임화로 인해 시장이 기업의 펀더멘털보다 뉴스 흐름과 유행에 따라 급격하게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투자자 자금과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빠르게 늘어난 데다 AI 관련 종목에 투자금이 집중되면서 주가가 단기간에 5~10% 급등락하는 현상이 과거보다 흔해졌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코스피 변동성지수는 올해 초 이후 200% 넘게 급등했다.
◆ 삼성전자 '깜짝 실적'에도 급락…"AI 수요보다 성장 속도 의문"
최근 코스피는 반도체 기업들이 강력한 실적을 발표했음에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삼성전자는 시장 기대를 크게 웃도는 실적을 발표했고 메모리 반도체 가격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AI 투자 확대 속도와 향후 실적 증가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삼성전자 주가는 오히려 큰 폭으로 하락했다.
정 창립자는 "시장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AI 수요의 지속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기업들의 실적이 앞으로 얼마나 빠르게 증가할 수 있느냐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다"며 "현재 나타나는 조정이 AI 투자 사이클의 종료가 아니라 높아진 밸류에이션을 조정하는 과정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른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여전히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퓨처럼그룹의 롤프 벌크 반도체·인프라 부문 책임자는 2분기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전 분기보다 50~80% 상승했으며 올해 하반기에도 추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벌크 책임자는 수년에 걸친 메모리 공급 부족과 대형 하이퍼스케일 기업들과의 장기 공급 계약을 근거로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견조하다고 평가했다.
KB금융그룹의 김 전략가도 "기업들의 펀더멘털과 높은 실적 가시성을 고려하면 현재의 조정은 단기적인 변동성을 견딜 수 있는 투자자들에게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올해 여전히 70% 상승…"AI 공급망 중심 한국 다시 주목"
최근 급락에도 코스피는 올해 들어 여전히 70% 넘게 상승한 상태다. 지난해에도 75% 이상 올랐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변동성이 이어질 수 있지만 한국 증시의 중장기 전망은 여전히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정 창립자는 "단기적으로 변동성이 지속될 수 있지만 중기적인 전망은 여전히 긍정적"이라며 "글로벌 위험자산 투자심리가 안정되면 한국이 세계 AI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다시 한국 증시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다만 한국 증시가 언제 본격적인 회복세에 진입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향후 반등 시점은 글로벌 증시와 국제 금융시장의 위험 선호 회복 여부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 SK하이닉스 美 상장·2분기 실적이 반등 변수
시장에서는 10일(금요일) 예정된 SK하이닉스의 미국 증시 상장이 단기적으로 메모리 반도체주에 새로운 상승 동력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벌크 책임자는 SK하이닉스의 미국 상장이 글로벌 투자자들의 접근성을 높이면서 메모리 반도체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달 말 발표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2026년 2분기 실적도 한국 증시의 향방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꼽힌다.
벌크 책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경영진이 2026년 하반기에도 메모리 반도체 상승 사이클이 지속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한다면 두 기업의 주가뿐 아니라 코스피 전반에도 상승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한국 증시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AI와 반도체가 최근 급락의 원인으로 돌아온 가운데 시장에서는 이번 조정이 AI 상승 사이클의 종료인지, 과도한 기대와 투자 쏠림을 해소하는 과정인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koinwon@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