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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태칼럼]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를 기리며

기사등록 : 2016-02-0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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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비디오 막전막후…“두 눈은 좌우를 보라고 있는 것”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처음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씨가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18기념재단은 힌츠페터 씨가 지난달 25일 독일 북부 라체부르크에서 숨졌다고 2일 밝혔다.

36년 전 독일 공영방송 ARD 일본특파원(한국특파원 겸직)으로 광주항쟁을 직접 취재한 힌츠페터 씨의 필름은 그해 5월 22일 ARD를 통해 전파되며 전 세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광주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외부 세계에 알린 증거물은 힌츠페터 씨의 자료가 유일했다.

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판결을 받은 후에는 중국특파원이었던 동료와 함께 1980년 9월 22일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45분짜리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한국 군사정권의 폭정을 고발하기도 했다.

‘광주비디오’ 제작자 힌츠페터 씨를 직접 만난 것은 13년 전인 2003년 9월 서울 수유리 아카데이하우스에서다.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해외민주인사 초청행사 참석차 주치의이자 여자친구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스태트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힌츠페터 씨의 방한은 일부 언론에 보도되긴 했지만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의 귀국에 가려져 큰 주목을 끌진 못했다.

힌츠페터 씨는 당시 왜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느냐고 묻자 “개인적으로 자유를 찾기 위한 민주화운동에 많은 관심이 있다”며 “두 눈이 있는 것은 좌우를 보라고 있는 것이고 코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 방문 1년 뒤인 2004년 심장병 수술을 받고 쓰러진 뒤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듬해 병세가 다소 호전된 후에는 다시 한국을 찾아 “가족의 만류로 광주에 묻히기는 어려워졌지만 다른 상징적인 방법으로 광주와 인연을 간직하고 싶다”며 한국에 대한 진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광주에 묻히고 싶은 바람을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담은 봉투를 5·18기념재단에 전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광주광역시는 당시 힌츠페터 씨가 사망하면 5·18묘지에 안장될 수 있도록 관련 조례를 개정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 지금도 자랑스럽다”고 했던 영원한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 씨와 13년 전 나눴던 대화 내용 일부를 다시 들춰봤다.

◆ 힌츠페터 씨의 ‘광주비디오’가 나오기까지

위르겐 힌츠페터 씨를 2003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났다. 가운데 사진 찍는 사람이 힌츠페터 씨의 주치의이자 여자친구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스태트다.<사진=이창길 기자>

- 해외 민주인사 중 한 사람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감상은?

“3년 전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 기념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었는데 이번에 인천공항에 도착해보니 한국의 경제적·민주적 발전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북한과 접경지대에 그토록 큰 공항을 세웠다는 것이 놀라웠다.”

- 1986년 서울 광화문 시위 취재 중 목과 척추에 부상을 당해 고통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건강상태는?

“(목을 가리키며) 지난 5월 목뼈 속에 들어있는 플라스틱을 교체했다. 처음에는 부상으로 인해 말도 할 수 없었고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어 글을 쓸 수도 없었으며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지금도 목과 팔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을 느낀다. 밝힐 수 없는 고통도 있다.”

- 이력서를 보면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학업을 중단하고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유가 뭔가?

“TV에 책임이 있다.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면서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부업으로 방송국에서 스튜디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던 중 아비투어(독일의 대학교 입학시험)를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카메라맨을 모집해 학업을 중단하고 18개월간의 실습과정을 거쳐 카메라맨이 됐다. 당시만 해도 TV라는 매체가 뉴미디어로 각광받았었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와 함께 카메라맨 생활을 시작한 동료가 4명 있었는데 대학교수가 되는 등 모두 큰 사람이 됐다.”

- 위험을 무릅쓰고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자유를 찾기 위한 민주화운동에 많은 관심이 있다. 두 눈이 있는 것은 좌우를 보라고 있는 것이고 코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자유를 억압받았던 당시 한국의 어려운 상황과 민주화운동은 독일을 비롯한 서방세계에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대학생들은 누구보다 빨리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유를 추구한다. 나 또한 대학생들의 주장에 공감해 여러 동료들과 함께 광주비디오를 만들게 된 것이다. 압박도 받았으나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주주의가 최선은 아니지만 민중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 당시 광주에서 찍은 필름을 독일까지 보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외국 기자가 당시 한국에 들어오면 KOIS(Korean Overseas Information Office, 지금의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에 가서 프레스카드를 받고 어디에서 무엇을 취재할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등을 밝혀야 했다. 그러나 나는 80년 5월 19일 광주 취재를 위해 한국에 도착했을 때 KOIS에 가지 않고 우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허가를 받고 광주를 취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차를 타고 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내가 행운이 따랐다고 말하는 것 중에는 당시 김사복씨란 운전기사를 만난 것도 포함된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차량은 독일 차인 오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주에 도착했을 때 계엄군이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내가 그 때 코리아헤럴드가 보도한 한 기사를 가리키며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봐야겠다고 하자 그들은 논길로 돌아가라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못 가길 바랐던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운전기사가 샛길을 찾아냈고 다시 군대를 만났다. 나는 당시 우리 일행이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꾸며댔는데 군인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를 들어가게 했다. 광주에서 나는 학살현장 등을 10롤의 필름에 촬영했는데 어렵게 군 검문을 통과해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마지막 순간에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에 공항에 있었던 한국 공무원들도 민주화를 원했기 때문에 심한 검문은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찍은 필름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알면서도 한쪽 눈을 감아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일본 공항에 도착해 조수에게 필름을 넘겨주었고 독일 공영방송 ARD와 협약을 맺고 있던 일본 방송이 롤로 돼있던 필름을 방송용으로 바꿔 위성으로 독일로 보냈다. 필름을 넘기면서 나는 독일 방송이 먼저 필름을 사용하고 난 후에야 다른 나라들도 방송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왜냐하면 당시 그 자료는 그야말로 왜곡되지 않은 유일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신속히 진실을 알릴 수 있었던 일이 지금도 자랑스럽다. 테이프를 넘긴 후 바로 다음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신 전화 팩스 등 모든 것이 불통이었기 때문에 한국 상황을 알기 위해선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언론보도들은 모든 것이 왜곡됐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 언론보도도 번역을 해 읽어봤는데 모든 것들이 왜곡돼 있었다. 5월 23일 다시 광주로 들어갈 때 외국 신문들을 몰래 갖고 들어가 광주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그후 광주에서 찍었던 필름들을 갖고 동료였던 베르트람 중국특파원과 함께 광주항쟁에 대한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우리는 당시 다큐멘터리를 독일 본사에 넘기면서 그 필름 중 일부라도 편집하거나 삭제하면 일을 그만 두겠다고 협박했다. 동료인 베르트람은 이번에 같이 한국에 오려했는데 호주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해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오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화를 선물한 고 힌츠페터 씨의 명복을 빈다.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선임기자 (medialyt@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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