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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한국과 4강’ ‘베트남 국민영웅’ 박항서, 시작은 편견 깨기였다

기사등록 : 2018-08-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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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김용석 기자 = 박항서 감독이 쏘아 올린 공은 어디까지 날아갈까?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그가 올 1월 아시아 축구 준우승에 이어 2018 아시안게임에서 순항,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베트남을 맡은 지 불과 10개월만의 ‘기적’이다.

베트남은 지난 27일(한국시간)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 브카시의 패트리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리아와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8강전에서 연장 승부 끝에 1대0으로 승리, 대한민국과 29일 오후6시 4강전서 만난다. 베트남은 이미 사상 첫 4강 진출에 축제 분위기다.

시간을 되돌려 보자. 지난해 10월 베트남 사령탑을 면접을 보던 날 박항서는 말했다. “내 키는 작다. 하지만 나는 기동력 있는 축구, 점유율 축구,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할 거다. 경기를 재미있게 만든다는 게 내 생각이다'라고. 베트남 축구협회가 궁금해 한 신장이 큰 선수들 상대로 한 전술을 답한 것이다. 맞춤 답안을 제출한 셈이다.

베트남 축구 사령탑 박항서 감독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과 맞붙는다. [사진= 베트남 축구협회]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당시, 박항서 감독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 [사진= 베트남 축구협회]

어찌보면 마지막 도전이었다. 그를 강하게 만든 것은 절실함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을 도와 4강 신화를 쓰는데 한몫했다. 하지만 환호도 잠시 그는 별로 환영 받지 못했다. 월드컵 이후 프로축구 구단 상주 상무를 거쳐 거쳐 3부 리그 창원시청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는 ‘해외 취업’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했다.

자신감과 그만의 철학으로 단도리했다. 그는 ‘변방 축구’ 베트남 선수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이해와 사랑을 퍼 주었다. 이른바 ‘아버지 리더십’이다. 선수들을 일일이 칭찬하는 것은 물론 발 마사지까지 해준다. 그리고 ‘이길수 있다’는 투혼을 심었다. 베트남 축구 선수들은 그의 지도아래 전사로 바뀌었다.

베트남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제일 급한 문제였던 ‘축구 열등감’을 뿌리 뽑은 것이다. 3명만 모이면 축구를 한다는 베트남이었지만 패배 의식이 강했다. 그들을 다독였다. 일종의 심리 치료였다.

베트남 국민들의 생각도 꿰뚫었다. ‘강대국’ 미국이 유일하게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0년대 냉전시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입했지만 실패했다. 그런 의지를 박항서는 지폈다.

한국에서는 ‘냉대 논란’에 시달린 그였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 감독이 떠나자 2002년 8월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대한축구협회가 정식 계약을 하지 않아 무보수 임시 감독이라는 논란이 나왔다.

대한축구협회가 히딩크 전 감독을 고문 자격으로 벤치에 앉히려 하자 ‘스승에 대한 홀대’에 대한 불만을 제기, 엄중 경고를 받았다. 지금도 그는 히딩크를 말할 때 ‘님’자를 빼놓지 않는다. 잠시 한국 대표팀 축구 사령탑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는데 그쳐 폐막 후 경질됐다.

이후 2005년 창단된 경남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지만 순탄치 않았다. 2007년 전남 드래곤즈를 거쳐 2011년 상주 상무를 맡았다. 이때는 상주 상무를 프로축구 1부 K리그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팀은 강등됐고 지난해 베트남에 가기 직전에는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으로 있었다.

베트남으로 간 박항서 감독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부를 바라봤다. 고정관념부터 고쳤다. ‘체력 문제’로 지적받던 베트남 선수들의 몸은 생각보다 강했다. 단지 키가 작을 뿐이었다. 작은 몸에는 뛰어난 민첩성이 있었다. 극한훈련을 통해 장점을 더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축구’를 심었다. 베트남 감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했다. 히딩크에게 배운 DNA를 불어 넣었다. 히딩크 감독이 태극전사들에게 사기를 복돋아 주었듯이 그도 베트남 선수들을 다듬었다.

모든 것을 잊고 축구에 올인했다. 베트남의 기적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렇다. “한국에서는 이것저것 보고 듣고 하는 이야기가 많아서 시끄러운데, 베트남어를 잘 모르니까. 신문도 못 읽죠, TV도 못 보죠,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들리는 게 별로 없죠. 저절로 축구에 '올인'이 돼요”라고.

2002년 4강 신화를 일군 히딩크 감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어느 팀도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팀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시밭길을 걷겠다.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이제 박항서 감독이 그 길을 가고 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동남아 한류에 ‘축구’가 하나 더 보태졌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2위 ‘축구 변방’ 베트남은 이제 동남아 축구의 중심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올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데 이어 아시안게임 메달에 도전하고 있다.

4강 상대는 한국이다. 한국과의 승부에 대해 박항서 감독은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고 조국을 사랑하지만 현재 베트남 대표팀의 감독이다. 베트남 감독으로서 책임과 임무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2002년 4강 신화때 대한민국의 쾌거에 당시 아시아의 쾌거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당시 베트남인들도 한국인을 만나면 축하 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1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과 베트남은 4강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fineview@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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