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장주연 기자 = 2014년 4월 16일. 그는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늦게까지 촬영을 하고 집에 돌아와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을 깨운 건 거실에서 들리는 뉴스 소리였다. 낯선 고등학교 이름과 침몰 등의 단어가 들렸고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떴다. 모두가 그러했듯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곧 뉴스는 번복됐다.
배우 설경구(51)의 신작 ‘생일’은 5년 전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던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했다. 참사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생일에 남겨진 이들이 모여 각자의 기억을 나누는 이야기다. 시인이 시로, 작가가 소설로, 가수가 노래로 그러했듯, 배우라 연기로 그날과 그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설경구는 ‘생일’ 속 아빠 정일이 됐다.
“출연 고민은 안했어요. 단지 ‘우상’(2019) 촬영 중이라 스케줄이 불가능했는데 다행히 조절이 잘됐죠. 세월호 참사 이야기지만 나, 우리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어서 좋았어요. 모두를 끌어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관객도 그렇게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봐 주고 이야기를 들어보길 바라죠. 그 외 다른 방향으로 확대되거나 불행의 말로 포장하고 싶진 않아요.”
출연을 결정한 후 설경구는 가장 먼저 유튜브 창을 열었다. 영화의 중심 소재인 생일 모임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확인하고 남겨진 이들의 표정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고 싶었다.
“생일 모임이 뭔지 궁금해서 직접 찾아본 거죠. 그러면서 유가족들의 여러 모습도 함께 봤고요. 솔직하게 유가족들을 직접 뵐 용기가 없기도 했어요. 그때 영상을 보는데 아버지들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팠죠. 내내 안무너지려고 노력하시더라고요. 물론 어머니들도 버티려고 애쓰지만, 결국에는 터져버려요. 근데 아버지들은 끝까지 눈물을 꾹 참고 어금니를 꽉 깨무세요. 그게 정말 너무 아팠어요.”
설경구 역시 정일을 연기하면서 감정 절제에 신경을 기울였다. 감정이 관객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들어오는 감정을 다 쓰지 않기 위해 계속 조절했다. 이종언 감독이 부여한 참사의 당사자이자 관찰자라는 설정 때문이기도 했다.
“감독님이 관객이 마음의 피를 철철 흘리는 순남(전도연)을 서서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정일의 어깨를 통해서요. 그래서 정일이 사정으로 몇 년간 한국에 오지 못했고, 순남이 처음에는 그를 밀어낸다는 설정이 생긴 거죠. 사실 영화에서 정일은 감정 쓰는 것조차 염치가 없는 인물이에요.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의 가슴과 머리를 분리해놓은 거죠. 공허해 보이는 상태가 될 때까지요.”
늘 참아내는 정일이 끝내 터지는 장면도 있다. 생일 모임을 담은 엔딩신이다. 이 시퀀스는 극적인 기교나 기법보다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총 3대의 카메라 앞에서 설경구, 전도연을 비롯한 수십 명의 배우가 30여분간 열연을 펼쳤다.
“힘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20년 넘게 연기하면서 처음 겪는 특별한 경험이었죠. 롱테이크로 촬영해서가 아니라 위안받았기 때문이에요.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데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눈물을 쏟을 때도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죠. 연기 칭찬이요? 이 영화만큼은 연기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찍었어요. 지금도 연기 잘했다는 말이 가장 끔찍해요.”
‘생일’ 홍보가 끝나면 그는 곧바로 현장으로 돌아간다. 3월 말부터 시작된 신작 ‘킹메이커’ 촬영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킹메이커’는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 김운범(설경구)과 그의 뒤에서 뛰어난 선거전략을 펼친 서창대(이선균)의 치열한 선거 전쟁을 그린다.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2017) 변성현 감독과 다시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좋은 점은 서로 굉장히 편하다는 거, 나쁜 건 너무 편해져서 서로 막대한다는 거죠. 변 감독이 ‘불한당’ 때는 안그랬는데 달라졌어요(웃음). 아무튼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역할 이름을 바꾸니까(설경구가 연기한 김운범은 당초 모티브로 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마음이 편해졌죠. 제가 바꿔 달라고 요청해서 바꾸게 됐어요. 그분을 흉내 내지 않아도 돼서 되게 자유롭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jjy333jjy@newspim.com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