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은빈 기자 = 일본 미투 운동의 상징인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30)가 성폭행 손해배상 소송에서 18일 승소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도쿄지방재판소(법원)는 1100만엔 손해배상 요구 소송에서 이토의 주장을 인정해 "합의없는 성행위가 이뤄졌다"고 판단,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전 TBS 워싱턴 지국장에게 330만엔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한 야마구치가 이토의 발언으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한 것에 대해선 "공익목적이었으며 진술 내용도 진실"이라며 기각했다.
[도쿄 로이터=뉴스핌] 오영상 전문기자 = 일본의 '미투' 운동에 불을 붙였던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가 18일 성폭행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리한 후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승소'라고 쓰인 배너를 들어보이고 있다. 2019.12.18 goldendog@newspim.com |
판결에 따르면 미국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던 이토는 TBS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야마구치를 알게됐다. 2015년 당시 워싱턴 지국장이었던 야마구치에게 진로상담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그해 4월 도쿄 스시집에서 술을 겸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이후 야마구치는 의식이 없는 이토를 자신이 묵던 호텔로 데려가 성관계를 가졌다.
재판의 쟁점은 성행위가 합의 하에 이뤄졌는지 여부였다. 판결은 이토가 식사 직후부터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만취상태였다는 점을 인정, "호텔 방에서 성행위로 인해 눈을 뜰 때까지 기억이 없다"는 이토의 진술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성행위가 있던 날 이토가 의료기관의 진단을 받은 점과 며칠 내로 경찰과 친구들에게 피해 상담을 했던 점을 언급하며 "성행위는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결론내렸다.
한편 재판부는 야마구치에 대해 "이토씨가 전차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까운 역에 들르지 않고 택시 운전사에게 지시해 호텔에 갔다"고 지적했다. 또한 성행위 이후 야마구치의 언행과 이토에게 보냈던 메일 내용, 법정에서의 진술이 모순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신빙성에 중대한 의문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재판부는 "성행위에 합의는 없었고 이토씨가 의식을 회복해 거절한 뒤에도 몸을 눌러 (성행위를) 계속했다"며 불법행위라고 인정했다.
야마구치는 이토가 기자회견과 저서 '블랙박스' 등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손해배상을 요구한 데 대해선 "이토씨가 성범죄 피해자를 둘러싼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피해를 공표했던 행위엔 공공성과 공익목적이 있으며 내용은 진실이라고 인정된다"며 기각했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가 18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 "합의없는 성행위"…형사절차와 민사재판의 엇갈린 판단
이번 판결로 인해 이토의 성범죄 피해에 대한 형사절차와 민사판결의 판단이 나뉘었다. 앞서 검찰은 이토 사건과 관련 야마구치를 불기소 처분했다. 이후 시민들이 참여하는 검찰심사회에서도 "불기소 상당"이라고 추인했다. 하지만 이날 민사재판에선 "합의없는 성교"를 인정해 배상 명령이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판단이 엇갈린 데 대해 "밀실에서 일어난 행위는 증거가 적기 때문에 형사와 민사재판에서 요구되는 입증 수준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국가가 개인에게 형벌을 내리는 형사사건에서 수사당국에 강제로 증거를 모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만 "합리적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을 정도"의 고도의 입증을 요구한다.
반면 민사재판은 개인 간의 다툼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제출한 주장과 증거에 기반해 어느 쪽이 더 확실한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 중견 재판관은 신문 취재에서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일본에선 특히 해외와 비교해 검찰이 기소단계에서 유죄 여부를 엄밀하게 판단하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토는 판결 후 기자회견에서 "형사사건이 불기소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민사소송을 통해 법정에서 증거가 나와 조금이라도 오픈될 수 있었다"며 "지금도 혼자 불안해하며 성폭행 피해를 마주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조금이라도 (그들의) 부담이 사라질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소송 막바지에 당일 상황을 목격했던 새로운 호텔 관계자의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며 "밀실에서 일어난 일은 전후 상황을 봤던 제3자의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자신의 일처럼 여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토는 "이번 판결로 하나의 마침표가 찍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승소했다고 해서 내가 입었던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전 TBS 워싱턴 지국장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가운데)가 18일 판결 이후 기자회견에 임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야마구치 "법에 저촉되는 행위한 적 없다" 항소방침
야마구치는 이날 판결 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재판부가 일방적으로 이토씨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고 비판하며 항소방침을 밝혔다. 그는 또한 "법에 저촉되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고 거듭 주장했다.
야마구치는 자신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경찰이 수사를 중단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총리 관저에 지인이 있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이 일로 상담을 한 적은 없다"고 부정했다.
이토의 주장에 따르면 이토는 피해를 입었던 해 직접 증거를 모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에서도 체포영장이 이미 발부됐고 그해 6월 나리타(成田)공항에서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이후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에 의해 체포는 무산됐다.
야마구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직접 취재해 '총리'(総理)라는 책을 쓴 인물이다. 아베 총리와도 개인 연락처를 공유할 만큼 친밀한 사이로 이뤄졌다. 이토의 폭로가 있었던 2015년 당시에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총리가 야마구치를 위해 수사를 무마시킨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이날 임시 각의(국무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개별 민사소송에 대해 정부로서 언급은 삼가겠다"면서 "성범죄나 성폭력은 성별과 관련없이 인권을 현저하게 짓밟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며, 정부로서 지원대책을 충실화하려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확실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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