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기 기자 = 유럽연합(EU) 27개국이 경제회복기금 7500억유로(약1020조원)에 합의함으로서 EU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순간을 맞이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유럽 기금 집행과 관리에 필요한 의사결정기구가 별도로 탄생하면, 이는 향후 EU가 연방국가로서 면모를 갖추는 첫발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또 자금조달에서 EU명의의 채권이 발행되면서 개별국가와 독립적인 재원을 확보하면서 연방국가로의 한걸음이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EU는 '해밀턴의 순간'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초대 재무장관으로 재정측면에서 실질적인 미 연방 탄생을 촉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하루전 EU 정상회의는 7500억유로의 경제회복기금에 합의하고 3900억유로의 보조금과 3600억유로의 대출 지원을 실행키로 했다. 샤를 미셸 EU정상회의 의장이 트위터로 합의 사실을 알렸고, 프랑스의 에마누엘 마크롱은 이번 합의를 "유럽의 역사적인 날"이라고 불렀다.
지난 17~18일에서 이틀 연장한 EU 정상회의는 보조금과 대출의 구성에 합의한 7500억유로의 회복기금과 1조740억유로(1460조원) 규모의 2021~2027 장기 예산안을 확정하고 이에 대해 공동 조달하는 방안도 합의했다.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인프라 등 공공투자 지출을 위한 중기예산의 75%는 회원국 분담금, 나머지는 세금 등으로 조달할 수 있게 했다.
3900억유로 보조금의 70%는 2021~2022년, 30%는 2023년에 집행된다. 3600억유로의 대출은 EU가 채권발행을 통해 전액시장에서 조달할 방침이다.
◆ 개별 회원국 '비토' 권한...부적합 발견시 '브레이크'
이 유럽회복기금과 중기예산은 회원국 의회와 유럽의회 비준을 거쳐 내년부터 가동된다.
애초 EU 집행위 안은 기금 총액 7500억유로 가운데 보조금이 5000억유로였으나 네덜란드·스웨덴·오스트리아·덴마크 등 소위 '검소한 4개국'(Frugal Four)이 보조금은 최대 3500억유로까지만 수용할 수 있다며 반발해 최종적으로 3900억유로로 조정됐다.
이제 그 기금의 집행 문제만 남았다. 코로나19 쇼크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부담이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기금의 집행과 관리에서 또한번의 진통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일단 보조금 지원 규모는 과거 회원국가들의 경제지표 보다는 코로나19의 쇼크를 측정해서 정해질 예상이다.
그리고 집행 중간에라도 회원국 가운데 한국가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집행은 중단되도록 할 것으로 보인다. 비토권한이 개별 회원국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다수결원칙인 EU 회원국의 55%이상 EU 전체 인구 65%이상을 대표하는 표결로 정해지는 의사결정은 인구가 적지만 재정강국인 '검소한 4개국'을 묵살하는 우를 범할 위험이 있다. 특히 연대채무의 경우에는 이 부문의 맹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가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기금의 운영에 대한 기구의 출범은 EU 연방을 향한 지배구조의 디딤돌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의 싱크탱크 저먼마샬펀드의 연구위원 다니엘 헤게더스는 "개별국가나 작은 그룹이 비토권을 갖게 해야 한다"면서 "현재 의사결정구조를 건설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순간에 와 있다"고 말했다. EU의 미래를 생각할 때 회복기금의 지배구조는 연방국가로 가기위한 디딤돌이라는 것이다.
◆ 메르켈 리더십, 브렉시트 상처 치유하는 재정통합의 첫 발걸음
그간 EU가 정부 형태에서 모자라는 점은 중요한 합의내용에서 언제든지 발을 빼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EU탈퇴 브렉시트였다.
하지만 이번 유럽회복기금의 합의는 EU 회원국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의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 됐다. 이후 브렉시트의 아픈 상처는 빨리 아물 것으로 관측된다.
독일은 특히 지난 7년간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의 80%대에서 60%대로 낮췄다. 이런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최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7500억 유로(약 1028조 원·유럽연합 국내총생산의 3.7%) 규모의 '유럽 회복기금' 구상에 합의한 것이다.
유럽연합 이름으로 채권을 찍어 빚을 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 중 5000억 유로를 코로나로 피해를 본 회원국들에 대출이 아닌 보조금으로 나눠준다는 것도 놀랍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국내에서 반대에도 무릅쓰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제안한 대규모 자금(5000억유로-약680조원)의 자금을 EU명의로 조달하는, 이른바 '프랑스-독일 제안'에 동의했다. 이 제안은 독일을 포함한 재정안정국들이 극구 반대해 온 것이다. EU 회원국들이 자금상환에 연대채무자이기 때문에 재정안정국이 손해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유럽회복기금의 자금조달 합의가 이제 프랑스-독일 제안을 그대로 실행하는 출발점이 됐다.
FT는 "유래없는 규모의 자금을 EU명의로 조달하고 또 이를 상환받지 않는 조건인 보조금으로 지급한다는 것은 EU로서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독일 재무장관 올라프 숄츠도 EU에도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의 순간 즉 '해밀턴 모멘트'가 왔다고 말했다. 해밀턴은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여러 주가 빚더미에 앉았을 때 각 주의 빚들을 통합해 연방국채로 만든 바 있다. 이를 발판으로 미국은 느슨한 연합체가 아닌 강력한 연방국가가 됐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독립전쟁 이후 여러 주들의 부채가 급증하자 각주의 부채를 연방국채로 통합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강력한 연방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EU회복기금 출범은 유럽이 좀 더 한 나라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된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 유로화, 미국 달러화 대체 기축통화로 부상할까
블룸버그 통신은 "EU 회복기금으로 달러의 세계적 패권에 대한 위협이 살아났다"며 "달러가 세계 주요 기축통화라는 지위에 있어 새로운 의문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달러 대비 유로화 환율은 이날 유로당 1.1527달러로 전일보다 0.69% 상승했다. 이는 지난해 1월9일(1.1543달러) 이후 1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유로화 가치를 끌어올린 것은 이날 새벽 나온 EU 회복기금 합의다. 경기 회복의 기대감도 있지만 기저에는 함께 빚을 내 나눠 쓴다는 프랑코-저먼 구상이 발표되면서 강세를 보였던 유로화가 더욱 기세를 더한 것이다. 유럽연합이 통화동맹을 넘어 재정동맹으로, 그리고 언젠가 미국 같은 연방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달러 가치는 하락세를 이어갔다. 이날 달러인덱스는 95.117로 전일 대비 0.74% 떨어졌다. 지난 3월20일 이후 등락을 거듭하던 달러인덱스는 4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EU 회복기금으로 달러의 세계적 패권에 대한 위협이 살아났다"며 "달러가 세계 주요 기축통화라는 지위에 있어 새로운 의문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외환운용사 AG 비셋 어소시에이션의 울프 린달 최고경영자(CEO)는 "(유로화가) 16개월 내에 달러 대비 30% 이상 오를 것"이라면서 이달 초 유로화 환율이 유로당 1.14달러를 넘어선 뒤 상승 경로에 들어섰으며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예상했다.
특히 유럽시장에서는 회복기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EU가 공동으로 발행하는 대규모 채권에 기대를 걸고 있다. 미 국채만큼 안전자산으로 인식될 경우 유로화 가치가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최근 유럽 증시가 오름세를 보이고 투자자들이 달러에 몰린 자금을 다변화하려는 상황에서 "신용 등급이 높은 EU 공동채권이 안전 자산으로서 인식돼 미 국채의 대체제로 제공될 수 있다"고 전했다.
국제신용사 무디스와 피치는 EU의 신용 등급을 'AAA'로, S&P는 'AA'로 평가하고 있다. 앙투안 부베 ING 선임 환율 전략가는 EU가 7500억유로 전체 회복기금에 쓰일 자금을 채권시장에서 확보할 경우 발행 규모가 2021~2022년 중 2625억유로, 2023년 2250억유로일 것으로 봤다.
이런 기대감에 유럽 채권시장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채 스프레드는 코로나19 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3월17일 2.7888%포인트에서 이날 1.554%포인트로 지난 2월 이후 가장 좁은 격차를 보였다.
유로화가 기축통화로서 달러화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장기 전망에 힘을 더하는 대목이다. 물론 갈길은 아직 멀다.
미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제 거래에서 가장 넓게 통용되는 통화다. 무역 거래 결제의 절반가량이 달러로 이뤄진다.
외환 거래에서 유로화의 비중은 2009년 28%로 정점을 찍은 뒤 현재는 20% 수준으로 오히려 줄어든 상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사진=로이터 뉴스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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