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태 기자 = "쿠바 정부는 폭력을 멈추고 국민들의 입을 닫지 말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은 기본권을 주장하는 쿠바 국민들과 함께 한다"며 이같이 촉구했다.
북한 정권이 공산권 우방 국가 쿠바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생활고를 호소하며 공산당 반대 시위에 나선 쿠바인들의 분노를 김정은 정권은 독재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초조하게 지켜볼 것이라는 지적이다.
[멕시코시티 로이터=뉴스핌] 이영기 기자 = 25일(현지시각) 멕시코 주재 쿠바 대사관 앞에서 현지 쿠바인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1.07.26 007@newspim.com |
27일(현지시각)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미국 전직 관리들과 인권 관계자들은 1994년 여름 이후 쿠바에서 벌어진 올해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메시지가 북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입을 모았다.
쿠바 정권의 정치적 폭압을 훨씬 능가하는 잔혹한 독재 체제를 70년 넘게 끌고 가는 북한의 김씨 정권은 식량난과 전력난에 지친 쿠바 시민들의 성난 함성을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비판이다.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인권 담당 부차관보는 "쿠바 시민들이 생활 실태 악화와 생필품 품귀 현상, 코로나19 관련 의약품 부족에 항의해 길거리로 뛰쳐나온 데 대해 북한은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정권의 엄격한 통제 때문에 북한에서 그런 시위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주민들이 굶주림과 빈곤, 불충분한 의료 서비스를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되는 정점이 어디인지 북한 지도부는 분명히 궁금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11일 수도 아바나 남쪽 도시 산안토니오데롯바뇨스에서 시작된 시위는 소셜미디어 등을 타고 급속히 번졌다. 이날은 아바나와 산티아고데쿠바 등 쿠바 4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쿠바 헌법에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목표나 공산당의 결정에 반하는 그 어떤 행동이나 자유도 용인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쿠바 시민들은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타드'를 외치며 행진하고 상점을 약탈하거나 경찰과 공산당 간부의 차량을 뒤집은 뒤 환호하기도 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주의적 독재 국가인 북한이 최근 쿠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정권을 향한 쿠바인들의 분노가 자발적으로 분출된 시위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고 지적했다.
◆ "이중통화제 철폐 이후 가파른 물가상승도 쿠바 시민 불만 키워"
쿠바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건 생필품 부족과 정전 사태 등 생활고가 지속되고 코로나19 확산세까지 사상 최악으로 치달아 기본적인 일상생활도 영위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단행한 이중통화제 철폐 이후 나타난 가파른 물가 상승도 사회 불안과 시민들의 분노를 키웠다.
하지만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민심을 폭발시킨 쿠바의 내부 사정은 김정은 정권의 압제와 주민들의 경제적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말한다.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HRNK) 사무총장은 "쿠바는 지독한 독재 국가이지만 북한만큼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며 "쿠바의 전문직 종사자들도 해외 근무를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지만 노예 노동과 다름없는 북한의 해외 파견 근로자와는 처지가 다르고, 쿠바인들도 북한인들에 비하면 운신의 폭이 넓다"고 비교했다.
그는 "김정은은 어떤 독재 정권도 영원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재임 중에 개혁과 변화, 개방, 투명성으로 가는 길을 선택해 북한에 평화적 변화가 이뤄질 수 있게 하라"고 촉구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비확산·생화학방어 선임국장을 지낸 앤서니 루지에로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연구원은 "쿠바의 반정부 시위는 김정은 정권을 겁먹게 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김정은 정권이 쿠바 시위를 통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호화 별장을 건설하며 엘리트 계층에 특전을 제공하기보다 북한 주민을 도와야 한다는 신호를 읽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북한과 쿠바는 1960년 수교 이래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유대를 토대로 60년 넘게 매우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북한이 쿠바 반정부 시위에 '미국 배후설'을 제기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처럼 대표적인 공산권 우방 국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생계 불안이 체제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 쿠바 시위가 김정은 정권에도 큰 부담을 준다는 방증이라는 설명이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22일 홈페이지에 "아바나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 혁명정부에 도전하는 반정부 시위를 제압하고 적대세력의 내정간섭 책동을 규탄·배격하는 군중 집회가 진행됐다"며 "미국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기치를 굳건히 고수해 나가기 위한 쿠바 인민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옹호했다.
이번 시위가 "사회주의와 혁명을 말살하려는 미국의 배후조종과 끈질긴 반 쿠바 봉쇄 책동의 산물"이라고도 주장했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16일과 21일에도 쿠바 반정부 시위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제재를 하고 60년 동안 쿠바 국민들의 인권을 침해한 게 바로 미국"이라며 위기를 미국 탓으로 돌린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의 주장과 일치한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김정은이 이번 시위를 매우 주의 깊고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킹 전 특사는 "쿠바는 유엔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로서 북한 편에 자주 서 왔다"며 "김정은은 그런 쿠바 시위를 보면서, 쿠바 보다 탄압의 정도가 훨씬 심한 자국 내 동요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우려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코헨 전 부차관보는 "대규모 시위에 대해 미국 등 다른 나라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공감할 심각한 내부 문제의 실제 원인에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서"라고 꼬집었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쿠바 시위는 북한 지도부를 관통하는 충격파를 던져줬을 것"이라며 "따라서 북한이 쿠바 정권을 지지하고 이 자발적인 분출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공산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들의 합창에 동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분석했다.
특히 "북한은 이념적 해이와 외국 사상, 심지어 한국식 표현과 유행, 음악 등에 반대하는 운동도 벌여왔다"며 "이는 정권이 외부 사상과 문화의 영향에 대해 우려하고, 외부의 '공해' 때문에 주민들이 '부패'하는 것을 방치한 결과에 대해서도 걱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이 아무리 쿠바와의 연대를 과시하며 미국을 시위의 배후로 비난해도 북한 엘리트 계층은 시위를 촉발한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쿠바인들의 분노 표출 방식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바나와 산티아고 등의 거리와 소셜미디어에서 '독재 타도'와 '자유' 등의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과 미국 마이애미 등 해외에서 이 같은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쿠바 출신 이민자들을 보면서 북한 엘리트들은 자신과 국가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쿠바에 지인을 둔 탈북 외교관 다수와 대화를 나눴다"며 "북한 외교관들과 외화벌이 일꾼, 그리고 엘리트 계층은 쿠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우리는 아마도 쿠바 정권의 마지막 몇 달, 혹은 마지막 몇 년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아무리 자국민을 억압하고 감시해도 영원히 지속되는 독재 정권은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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