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이 극심한 상황에서 미국이 반도체 제조업체에 내부정보를 요구한 것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미국으로부터 투자 압박을 받는 동시에 거대시장인 중국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우리 기업들은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유례없는 기밀 요구에 반도체 기업들 '당혹'
27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미국 백악관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사와 수요업체를 대상으로 반도체 공급·수요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해당 설문은 3대 고객 리스트와 예상 매출, 제품별 매출 비중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문조사 마감일은 백악관에서 3차 반도체 회의가 열린 지난 23일(현지시간)로부터 45일 뒤인 오는 11월 8일이다.
대상 기업은 3차 반도체 회의에 참석한 삼성전자, 대만의 TSMC, 미국의 인텔 등을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 대부분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설문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반도체업계에선 사실상 글로벌 반도체 기업 대부분이 설문조사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뉴스핌] 사진공동취재단 =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2020.10.28 photo@newspim.com |
반도체 공급처와 핵심 고객, 생산 계획 등은 기업 기밀 사항으로 외부에 철저히 공개되지 않는다. 기밀 사항이 자칫 경쟁사에게 까지 유출되면 최악의 경우 경쟁력 악화로 기업 존폐 위기에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급불안이 지속되자 어디에서부터 병목현상이 발생하는지 살피겠다는 게 미국의 명분이다. 문제는 설문 대상이 차량용 반도체 등 시스템 반도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문 대상은 우리나라가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생산공장이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 밖에 없다. 미국에 생산 계획 등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미국 공장 뿐만 아니라 중국 공장의 생산 계획까지 제공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다.
각 기업들은 백악관의 요구에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눈치보기에 들어갔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정확히 확인하고 있다"며 "기업들의 기밀 사항을 내놓으라는 유례없는 요구"라고 전했다.
◆공급망 동아시아에 편중.."미국에 투자해라" 압박으로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해소를 명목으로 자국 반도체 생산망 강화를 위해 글로벌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다.
미국은 각 기업들이 이번 설문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 밝혔으나 엄포도 빼놓치지 않았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수단이 있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미국 정부가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했다. DPA는 미국 대통령이 국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쌓아 놓거나 가격을 책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사실상 미국이 공식적으로 반도체를 전략물자로 삼겠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은 코로나19, 자연재해에 따른 공급망 교란, 높은 중국 의존도를 국가 안보에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등 원천기술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제조의 80%를 대만,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 맡기고 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 2021.06.03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미국의 반도체 산업 매출은 세계 반도체 매출의 50%를 차지하고 있지만, 제조 능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37%에서 지난해 12%까지 하락했다.
미국의 압박에 미국 현지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삼성전자도 결단을 내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미국 현지에 170억 달러(약 20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투자를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도 10억 달러(1조1100억원)를 들여 실리콘밸리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 9일 열린 '미 반도체, 배터리 공급망 회복과 한미 산업협력의 기회 웨비나'에서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라며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11월까지 아직 시일이 남아있는 만큼 미국의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인텔이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하는 등 업계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정보가 경쟁 기업에 제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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