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올해도 최저임금 법정 심의 기한(6.29)을 훌쩍 넘기면서 최저임금위원회의 의사결정 구조 개편 필요성이 재차 제기됐다.
1988년 최저임금위원회 설립 이후 법적 심의 기한을 지킨 것은 9번에 불과하다. 대부분 막판까지 협상을 질질 끌다 공익위원이 제안한 촉진 구간 내에서 최저임금을 정하곤 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노·사간 소모성 논쟁을 자재하고, 주요 선진국처럼 의회나 정부 주도로 최저임금을 결정하자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온다. 대신, 최저임금을 결정한 기관에 이에 대한 책임을 부여해 합리적 수준의 최저임금이 결정될 수 있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 법정기한 또 넘긴 최저임금위…36년 역사상 기한 내 처리 불과 9번
6일 최저임금위원회에 따르면, 최저임금위는 이날 오후 3시부터 정부세종청사에서 '제11차 전원회의'를 진행 중이다.
이날 회의에서 노·사 양측은 공익위원들의 내년 최저임금 수준 최초 요구안에 대한 2차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2300원(노동계 1만2000원, 경영계 9700원)의 간극을 보였다. 현재로서는 노사 간 지지부진한 협상이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행법상 최저임금 심의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심의 요청 이후 90일 이내에 마쳐야 한다. 심의 결과는 장관에게 전달하도록 되어 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지난 3월 31일 최저임금위에 내년 최저임금 심의를 요청했고, 원래대로라면 6월 29일까지 심의를 마쳤어야 한다. 이미 법적 심의 기간을 훌쩍 넘긴 셈이다.
1988년 최저임금제도 도입 이후 36년 역사상 법정 심의 기한을 지킨 것은 단 9차례에 불과하다. 심의 기한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최저임금법상 심의 기한에 대한 강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고용부 장관의 심의 요청 이후 90일 이내에 심의를 마쳐야 한다는 법정기한은 '효력 규정'이 아닌 일종의 '훈시 규정'이다. 즉, 법정기한 내 심의를 마치지 않아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는다.
때문에 매년 최저임금은 고용부 장관의 최저임금 고시일(8.5)을 얼마 앞두고 물리적 시간이 임박해서야 결론이 났다. 최저임금 결정 이후 노사 양측의 이의제기, 고시를 위한 서류 과정 등 행정 절차가 최소 2주 이상 필요한데, 이에 7월 중순까지 심의를 지속하는 일종의 늑장 심의가 관행이 된 것이다.
최근 10년간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려졌다. 지난 2014년(2015년 최저임금 결정) 법정 시한이 지켜진 이후 7년간(2015~2021년) 최저임금 심의 기한은 법적 마지노선을 매번 넘겼다. 그나마 최저임금위 존폐 위기가 심각히 대두됐던 지난해에는 공익위원 주도로 법정 기한(6.29)을 간신히 마쳤다. 올해 역시 공익위원들이 '키맨' 역할을 하며 최저임금 심의를 주도하고 있다.
최저임금 심의를 경험해 본 한 공익위원은 "공익위원이 심의촉진 구간을 제시하며 일선에 나서지 않는 이상 노사협상에 제대로 된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며 "매번 최저임금 심의가 끝난 후 공익위원들에게 질타가 쏟아지는데, 공익위원들 역시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전했다.
◆ 주요국 최저임금 결정 의회·정부 주도…한국도 결정방식 개선 필요성
올해도 최저임금 심의가 장기전에 접어들었다. 최저임금위 안팎에서는 빨라야 다음 주는 돼야 심의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노동계는 물가 상승, 최저생계비 보장 등을 내세워 큰 폭의 증가를, 경영계는 경기 침체에 따른 기업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소폭 인상을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3일 한 경제매체에서 고용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빌려 "내년 최저임금이 1만원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이에 반발한 민주노총은 "이럴 거면 최저임금위라는 외피는 벗고 대통령이 직접 최저임금을 결정하고 직접 노동자, 시민을 설득하자"고 비판했다.
선진국의 사례는 어떨까. 최저임금위원회가 발간한 '2022년 주요 국가의 최저임금제도'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들은 의회와 정부 주도의 최저임금 결정방식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연방 최저임금과 주정부 최저임금이 다르게 책정되는데, 연방최저임금은 연방의회에 최저임금 개정안이 제출되고, 상·하원에서 심의해 개정이 승인된 후 대통령 서명으로 결정된다. 각 주정부도 이와 유사한 절차를 거친다. 다만 카운티·시는 주민투표 등을 통해 조례를 제·개정해 별도의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중국은 지방정부가 노사단체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고, 중앙정부가 검토를 거쳐 공포하는 방식이다. 프랑스는 행정명령에서 규정한 통계지표와 단체협상 국가위원회에서 제시된 노사 대표의 의견을 종합해 국무회의에 당해연도 법정 최저임금 인상률을 상정, 결정하는 식이다. 캐나다는 각 주정부에서 최저임금을 결정해 공시한다.
독일은 우리와 같이 최저임금위원회를 운영해 출석 위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한다. 영국 또한 저임금위원회를 운영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데, 위원회 전원합의를 전제로 한다. 최저임금 수준 심의 마지막 회의에서 전원회의 권고안이 나올 때까지 토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일본은 우리와 같은 듯 다른 결정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가 다른점은 최종 결정을 지자체 노동국장이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용부 격인 후생노동성의 대신이 매년 5월경 중앙최저임금심의회에 자문을 요청하며, 법률에 따라 설치되는 전문부회가 조사심의를 거쳐 최저임금액 개정 목표치를 매년 7월경 제시한다. 최저임금액 개정 목표치를 받은 후생노동대신은 이를 공시하고, 각 지방최저임금위원회는 법률에 따라 전문부회를 설치해 조사·심의를 진행한다. 심의 결과는 지자체 격인 도도부현 노동국장에게 전달하고, 이를 기초로 도도부현 노동국장이 지역별 최저임금액을 결정한다.
주요국 사례를 살펴보면 최저임금 결정을 정부나 의회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충분한 노사 합의를 전제로 한다. 대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최저임금을 결정한 기관이 갖는다.
한국의 경우 근로자위원 9명, 사용자위원 9명, 공익위원 9명 등 총 27명으로 이뤄진 최저임금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하지만, 노사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다. 사실상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공익위원들이 최저임금 촉진 구간을 정해 놓고 이 틀 안에서 합의하라는 식이다. 노사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데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주장이지만, 이 때문에 '졸속 심의', '반쪽 회의'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다닌다.
이에 따라 한국도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국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중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노사 의견을 반영해 정부가 결정하는 구조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최소한 정부주도로 결정했다는 명분이 생기고, 책임성도 높일 수 있다.
노동연구에 정평한 한 전문가는 "최저임금 심의가 왜 매번 늦어지는가 생각해보면 최저임금 심의기간이 너무 짧다보니 노·사 의견을 충분히 듣고 타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면서 "한국의 경우 특히나 노·사간 입장이 첨예하다보니 협의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지만, 협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최소한 충분히 협의를 거쳤다는 명분을 얻을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전문가는 "어차피 최저임금 논의가 끝난 후 정부가 비판을 받는 현 상황에서 노사 간 충분한 협의를 거쳐 정부 주도로 결정하는 방식이 맞을 수 있다"면서 "올해 심의가 끝난 후 당장 논의에 착수해 볼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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