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성화 기자 = 과거 성폭행 범행을 자백하는 내용의 공범 유서라도 신빙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 등 3명에게 각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7일 밝혔다.
대법원 [사진=뉴스핌 DB] |
A씨 등은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6년 11월경 한 학년 후배 여학생에게 술을 마시게 한 뒤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피해자에게 유사성행위를 하고 간음한 혐의로 2021년 12월 기소됐다.
이들에 대한 수사는 A씨 등과 동창생이던 B씨가 2021년 3월 유서를 남기고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B씨의 자필 유서에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저지른 성폭행 범행에 대한 반성과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검찰은 B씨의 유서를 증거로 제출했으나 A씨 등은 "당시 피해자와 만나 술을 마신 기억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1심은 B씨가 작성한 유서가 형사소송법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증거능력이 없고 신빙성도 인정되지 않는다며 A씨 등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자필 서류인 유서는 전문증거로,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형사소송법 제314조 단서에 따라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해졌음이 증명돼야 한다.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증거인 유서의 핵심적인 내용이 피해자의 진술 및 그밖에 객관적인 정황과 배치되는 점, 사건 직후 이뤄진 진료 과정에서 성폭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에 비춰 볼 때 유서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항소심은 유서의 증거능력 및 신빙성이 인정된다며 A씨 등에게 각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 유서는 망인(B씨)이 죽음을 앞둔 시점에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신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공범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서 그 작성 과정에 제3자의 강요나 회유 등이 개입됐다고 볼 정황이나 피고인들을 무고할 만한 동기나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원심 판단은 수긍할 수 없다"며 항소심 판단을 뒤집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유서가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됐을 개연성이 있다고 평가할 여지는 있다"면서도 "유서의 내용이 법정에서의 반대신문 등을 통한 검증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신빙성이 충분히 담보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봤다.
또 "사건 발생일로부터 무려 14년 이상 경과된 후 작성됐고 그 주요 내용이 구체적이고 세부적이지 않다"며 "오히려 일부 내용은 피해자의 진술 등과 명백히 배치돼 망인에 대한 반대신문이 가능했다면 기억의 오류, 과장, 왜곡, 거짓 진술 등이 드러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심 판단에는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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