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뉴스핌] 이정아 기자 = 저출산·고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국민연금 가입자는 줄어들고 수급자는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금 고갈 시점도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연기금에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 보험료가 근로소득에서 납부된다는 점에서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또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낮은 만큼 국고 투입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 2055년 국민연금 고갈…EU는 노령연금에 평균 국고 25% 투입
25일 국민연금 제5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추계기간(2023~2093년) 동안 우리나라 전체인구는 5156만명에서 2782만명으로 감소한다. 국민연금 가입자 수는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줄면서 같은 기간 2199만명에서 861만명으로 지속 하락한다.
재정추계위원회는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오는 2055년 국민연금 수급자 수가 가입자 수를 상회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과정에서 연기금은 2040년 최고 1775조원으로 정점을 찍은 후 급속도로 감소해 2055년 소진된다.
정부는 지난 4차 재정추계 당시 국민연금이 2042년에 수지적자가 발생하고 2057년에 기금이 소진할 것으로 예측했다. 당초 예상보다 기금고갈 시점이 약 2년 앞당겨진 것이다. 이로 인한 제도부양비는 5차 추계기간 24%에서 119.6%로 약 5배 이상 급증한다.
윤석열 정부는 국민연금의 지속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연금개혁을 추진 중이다. 이 과정에서 연금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제도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험료율 인상 등 모수개혁과 더불어 국고 투입이 필수적이라고 제시한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는 '국민연금 3-1-1.5' 개혁안을 제시했다.
2025~2030년 5년간 보험료율은 단계적으로 3%포인트(p) 인상하는 한편 매년 연기금에 GDP 대비 국고 1%를 지출하고 기금수익률 목표를 기본 가정보다 1.5%포인트 상향하면 2030년 이후부터는 연기금의 항구적 운용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또한 현재 국민연금을 신(新)연금과 구(舊)연금으로 분리하되 구연금의 미적립 충당금인 609조원에 대해서는 국고를 투입해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KDI는 자체 추계 결과 국민연금 고갈 시점을 2054년으로 정부 추계보다 1년 더 앞당긴 바 있다.
연금개혁 논의가 지속되면서 국고 투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에서는 국민연금을 포함한 공적연금 재원으로 국가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국민연금연구원 연금제도팀에 따르면 EU 국가들은 2018년 기준 연금지급액의 평균 25%를 국고로 충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별로 핀란드가 20.4%로 가장 높았고 벨기에(16.3%), 스페인(12.16%), 오스트리아(5.3~12.55%)가 뒤를 이었다. 독일은 평균임금 상승률과 연금보험료 상승률을 국고보조금에 연동하는 방식으로 매년 약 30%의 지출이 이뤄진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모든 국가의 공적연금 시스템은 각각 다르지만 노후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복지제도로 보고 있는 건 동일하다"며 "국고를 투입하느냐 안 하느냐는 일종의 선택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고령화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은퇴세대 부양은 어차피 공적연금이 아니더라도 국가가 결국 또 다른 돈을 마련해 부양하게 될 것"이라며 "국고를 투입하자는 인구구조 변화를 넓게 보고 노동소득뿐만 아니라 자본소득도 기여하라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 韓 조세부담률 20.9%…"국고 투입하자는 주장은 무책임"
다만 국민연금에 재정을 투입하자는 것은 조세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근로소득의 9%다. 가입자와 기업이 절반인 4.5%씩 부담한다. 가입자는 수급 시점이 되면 매달 연금을 지급받는다. 연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전 국민이 걷는 세금을 투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다.
재정당국인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는 "국민연금은 복지제도가 아니다"라며 "연금이 고갈되는 데 국고를 투입하겠다고 하면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반 국민들이 반발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다 조세부담률이 현저하게 낮은 나라"라며 "세금은 내기 싫으면서 연금이 부족하니 세금으로 충당하자는 것은 무책임한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조세부담률이란 국민이 소득 중에서 얼마만큼을 세금으로 부담하느냐를 나타내는 지표를 말한다. 국내총생산(GDP) 또는 국민소득에서 국민이 낸 세금(국세+지방세)이 차지하는 비율을 일컫는다.
기재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지난 2017년 18.8%에서 2020년 20.0%→2021년 22.0%→2022년 23.8%로 지속 증가하다가 지난해 23.2%로 소폭 줄었다. 올해에는 20.9%로 예상된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첫 20%를 돌파한 2020년 기준 덴마크는 조세부담률이 46.5%에 육박했다.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냈다는 의미다. 이어 프랑스(30.6%), 캐나다(29.5%), 이탈리아(29.4%) 순이다. 2019년 OECD 평균 조세부담률은 24.5%였지만 우리나라는 19.9%에 그쳤다.
국민연금, 산재보험,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성 기금을 합한 국민부담률은 2022년 32.0%로 30%를 첫 돌파한 후 올해 29.3%로 다시 주저앉았다. 기재부는 오는 2027년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을 각각 21.7%, 29.3%로 전망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전 한국연금학회장)은 "OECD 주요 국가에서 노령연금에 국고를 투입했다는 주장을 잘 살펴야 한다"며 "일례로 독일의 경우 국고투입이 약 30% 정도 되지만 독일은 과거 50~60년간 지불한 보험료가 한국의 5~6배 수준으로 지금도 우리보다 두 배 더 부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일이 우리보다 보험료를 더 걷었음에도 연금지출의 약 30%를 국고로 충당하는 것은 과거 연금제도를 방만하게 운영한 탓"이라며 "저소득층 기초연금, 각종 크레딧으로 인한 지급 부족이 초래한 것은 눈감고 우리도 기초연금과 출산·군복무 크레딧을 강화하자는 것은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정 교수는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OECD 국가 대비 비교적 낮다는 지적에 대해 "당연히 세금을 거둬야 한다"며 "노후빈곤을 해결하고 양극화된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면 세금을 높여야 한다. 자산에도 세금을 부과해서 그 재원으로 국민연금, 기초연금에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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