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엔 늘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변수가 하나 이상 지배적인 쟁점으로 자리잡아왔다. 전쟁, 외환 위기, 모라토리엄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그리스 부도 사태, 미국 재정절벽, 연방준비제도의 '테이퍼링' 등을 지나 지금은 '미국 국채 유동성'이 그 자리를 꿰찼다.
미국 국채 시장은 특히 지난해 '플래시크래시' 이후 불안감을 안고 살아왔는데, 이번 주 11일 증권산업및금융시장협회(SIFMA)가 주최한 유동성 관련 컨퍼런스는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주최 측이 넘치는 참석자를 받기 위한 장소를 더 만드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 미국 재무부에서도 2명의 관리를 보내 업계의 이야기를 청취하도록 했다니 이 문제가 채권시장을 뛰어넘는 쟁점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국채 유동성이라니까 언뜻 채권시장 내부 쟁점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전 세계 금융의 핵심이 미국 국채다. 전체 12조2000억달러에 달하는 발행잔액의 절반을 외국계 투자자가 차지하고 있어, 이 시장의 유동성 위기는 글로벌 위기 요인이다.
유로존 경제의 1.8%밖에 안 된다는 그리스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리스는 최종 국가부도 사태가 나더라도 별 문제 없이 끌고 갈 수 있다는 내부 셈법이 끝난 쟁점으로, 아직도 최근 글로벌 시장의 '달리 걱정할 것이 없을 때 활용하는 재료' 정도가 됐다.
그런데 국제 금융의 중심이면서, 특히 현금자산과 동일하게 현금보다 더 안전한 존재로 취급받던 이 시장의 수급에 구조적인 문제가 부상한 것이다.
정의상 '유동성'이란 특정 자산을 현금화하기 쉬운 정도를 가리킨다. 현금 또는 현금성자산은 유동성자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쉽게 현금으로 전환(유동화)되기 때문이다. 증권이나 상품시장에서는 충분한 매수자와 매도자가 존재해서 일부 매수 매도주문으로는 시장가격이 크게 움직이지 않는 정도를 유동적이라고 한다. 특정증권이나 수단의 거래를 얼마나 쉽게 실행할 수 있는지로 좁혀서 얘기할 수도 있다.
현금보다 더 유동적 자산으로 간주되던 미국 국채의 매력인 유동성이 사라진다면, 글로벌 금융시장의 일대혼란은 피할 수 없다.
최근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지난 4월 중순까지만 해도 1.9%대로 2%를 밑돌았지만, 단기간에 2.5%선까지 급격하게 상승했다. 헌데 이런 단기 금리 상승보다도 채권거래량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시장참가자들이 더 우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겉보기에 현재 미국 재무증권 일일 거래량은 2007년 고점에 비해 10% 줄어드는데 그친 정도다. 하지만 전체 채권거래에서 재무증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무려 70%나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리 예측했다고 이름을 날렸던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뉴욕대 교수는 이런 양상에 대해 "유동성 시한폭탄"이란 단어를 쓰면서 이 때문에 시장이 붕괴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2010년 5월, 단 30분 만에 미국 주가지수가 10% 가까이 폭락한 '플래시 크래시', 2013년 봄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의 '테이퍼(taper)'발언으로 미 국채 금리가 100bp 치솟은 사례, 지난해 10월 발생한, 단 1분 만에 미 국채 금리가 40베이이스포인트(40bp=0,40%포인트) 급락한 채권시장의 '플래시 크래시' 사태는 시장 유동성 부족 사태의 다른 이름이다. 올해 독일 분트(10년물 국채) 수익률이 5bp에서 80bp까지 며칠 사이 수직 상승한 것도 유사한 사례로 꼽힌다.
통계학적으로, 과거 금융시장 사례로 보아 거의 발생하기 힘든 '유동성 사건'들이 글로벌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로 인해 시중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때에 여러차례 발생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번 주 글로벌 최대 사모펀드 업체인 블랙스톤(Blackstone)의 스티븐 슈워츠먼 최고경영자도 "유동성 고갈이 다음 금융위기 강도를 높이거나 아예 위기 자체를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은행 규제 강화 때문에 이들이 충격 완충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면서 시장 규제를 질타했다. 이런 주장은 당신 같은 금융가들의 '탐욕'이 항상 위기이 근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 두 사람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결론은 같다. 특정 증권시장에 매수 매도주문이 충분하지 않은 것은 항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큰 파급효과와 피해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위기는 국민 세금과 정부 발권력을 낭비하게 만든다.
지금은 연방준비제도가 빠르면 9월부터 '정책금리를 쏘아 올릴(Lift-Off)'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미 국채시장의 혼란은 완전한 금융위기로 발전할 수도 있는 개연성이 더 높아 보인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 뿐 아니라 수조달러에 달하는 매입국채 등을 대차대조표에서 줄여 나가야 한다. 국채는 만기까지 보유한다고 해도, 시장의 큰 손 매수세력이었던 중앙은행이 매도세력이 된다.
글로벌 금융 위기는 미국이 진원지인 데도 국제 투자자들은 미국 국채만큼 안전한 자산이 없기에 이를 더 담았다. 개인투자자들도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한 투자처를 찾으면서, 미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방대한 금융상품이 팔려나갔다. 연준이 양적완화로 막대한 국채를 사들였고, 다른 나라 정부와 중앙은행 역시 미 국채 비중을 늘렸다.
긴 호흡으로 보면 시중 유동성 우려는 늘 있어왔고 또 그럴 수 있다. 원래 투자은행들은 어려운 시절이 오면 남 사정 돌보지 않고 보유한 국채를 시장에 던졌으며, 이런 식으로 채권은 늘 필요치 않을 때 유동성이 넘치고, 필요할 때는 부족했다. 또 어려울 때 채권가격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면 결국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원하는 연기금과 보험사들이 시장이 진입하면서 체계적 위험으로까지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란 주장도 가능하다.
JP모간 자산운용의 로버트 미셸 수석투자전략가와 같은 인사는 "재무증권 거래가 줄어들면 시장참가자들 중에서 단기운용역들이 줄어들고 (장기)투자자가 늘어나는등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 미국 국채시장의 위기가 불가피하며, 또 이런 불가피한 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증권시장의 흔한 '청산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은 신흥국이나 중소 투자자들이 겪을 위험은 무시하는 대형 기관투자자나 약탈적 투자(?투기)은행 혹은 '핫머니'의 시각이다. 아예 대놓고 '호환마마가 왔으면 좋겠다 곶감 좀 얻어먹게'라고 솔직하게 말을 하라.
[뉴스핌 Newspim] 김사헌 국제부장 (herra7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