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 이홍규 기자] 반도체 시장에서 줄곧 1위 자리를 유지해오던 인텔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막대한 데이터 처리를 요구하는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고성능 범용 반도체보다 맞춤형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반도체 시장에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25일자)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한 종류인 인텔 중앙연산처리장치(CPU)가 퍼스널컴퓨터(PC) 시장을 80% 가량 점유하고 서버 시장은 거의 완전히 독점하다시피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 단극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인텔의 프로세서가 막대한 데이터를 요구하는 기계학습과 AI 응용 프로그램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향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텔의 주요 고객인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빅데이터 센터 사업자들과 함께 다른 회사의 '특화 프로세서(specialised processors)'를 채택하고 있으며 아예 스스로 부팅할 수 있는 프로세서를 설계하고 있다.
<사진=블룸버그통신> |
◆ 인텔 입지 넘보는 '엔비디아'…작년 칩 판매 3배 '껑충'
인텔의 아성을 흔드는 조짐은 엔비디아(Nvidia)의 부상에서 나타난다. 최근 AI와 서버 시장에서 폭발적인 수요를 자랑하는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연산처리장치)가 그 예다. '특수 프로세서'로 알려진 가속기(Accelerator)의 일종인 GPU는 '고속병렬연산'을 특징으로 한다.
PC에 사용되는 CPU가 순차로 들어오는 데이터 처리에 특화됐다면 GPU는 수천개의 코어(프로세서의 두뇌)를 바탕으로 동시에 여러 연산을 처리하는 병렬 처리에 유리하다. 엔비디아의 최신 프로세서 칩은 3584개 코어를 자랑하는 데 반해 인텔의 서버 CPU는 최대 28개에 그친다.
엔비디아는 CUDA로 불리는 코딩 언어를 개발해 고객이 다른 작업을 위해 프로세서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도록 해놨다. 엄청난 데이터를 동시 다발적으로 처리하고 용도가 다양한 AI 시스템에 딱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현재 수많은 인터넷 회사들이 엔비디아의 GPU를 사용해 음성부터 의료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AI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엔비디아의 인기는 실적을 통해 확인된다. 지난 회계연도 전체 엔비디아가 GPU를 데이터 센터 사업자에 판매해 얻은 매출액은 3배가량 늘어났고, 지난 분기 전체 매출액은 55%나 증가했다. 회사 주가는 1년 만에 무려 4배가량 올랐다.
(주황색) 엔비디아 (남색) 인텔 주가 5년 추이 <자료=블룸버그통신> |
◆ 특수칩 개발 경쟁…인텔 고객 구글, 자체 개발 나서
이처럼 효율성과 빠른 속도를 필두로한 '특수 프로세서'의 개발은 회사 크기를 막론하고 진행되고 있다. 이미 수 십개의 스타트업들이 AI 알고리즘을 내장한 칩을 개발하고 있으며 구글은 음성인식을 위해 '텐서 프로세싱 유닛(TPU)'이라는 주문형 반도체(ASIC)를 구축했다. ASIC는 특정한 용도에 맞도록 주문에 따라 제작된 주문형 반도체를 말한다.
또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의 온라인 검색 서비스인 '빙(Bing)'에 기반하고 있는 여러 서버에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프로그래머블 반도체'(FPGA; 프로그램이 가능한 비메모리 반도체의 일종)을 추가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마크 루시노비치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우리는 전세계 어떤 조직보다 많은 FPGA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인텔은 최근 몇 년간 ASIC나 FPGA의 제작보다 CPU 프로세서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는 전략을 고수해왔다. 인텔의 칩 판매량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가트너의 알랜 프리스틀리의 IT 고문은 "가속기의 빠른 부상은 인텔에 나쁜 소식"이라고 말했다. 더 많은 연산 작업이 가속기에서 일어날 수록 CPU의 필요성은 줄어든다는 분석이다.
인수합병(M&A)이 인텔에 한 가지 대답이 될 수 있다. 실제 인텔은 재작년 FPGA 제조업체인 알테라(Altera)를 무려 167억달러에 인수했고, 작년 8월에는 소프트웨어에서 칩에 이르기까지 특수 AI시스템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너바나(Nervana)를 4억달러에 사들였다.
◆ M&A 대응에도 경쟁 만만치 않아…AI 진척이 관건
올해 여름에는 엔비디아에 대항하기 위해 코드명 '나이츠 밀(Knights Mill)'이라고 불리는 새 프로세서를 판매할 예정이다. 현재 너바나의 기술이 탑재된 '나이츠 크레스트(Knights Crest)'라는 또 다른 칩을 개발 중이다. 어느 순간에는 알테라의 FPGA와 인텔의 CPU가 결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코노미스트 지는 분석했다.
하지만 경쟁 업체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엔비디아는 이미 자체 컴퓨팅 플랫폼을 구축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미 수많은 회사들은 AI 프로그램 제작에 엔비디아의 칩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 엔비디아는 가상현실(VR) 분야에서 소프트웨어 인프라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IBM 역시 '파워'라 불리는 개방형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텔을 압박하고 있다. 이를 이용하면 특수 칩 제조업체들은 IBM의 파워 CPU와 자사 칩을 손쉽게 결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인텔의 독주 체제가 허물어질지 여부는 AI가 어떻게 개발될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AI의 파급 효과가 계속 일어나면 여러 종류의 프로세서들이 갖을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아진다.
이에 이코노미스트지는 "AI 기술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고려할 때 앞으로 여러 프로세서가 더 많은 기회를 갖을 확률이 높다"며 "규모와 복잡성에 상관없이 모든 작업을 다루는 거대한 CPU의 시대는 끝이났다. 인텔의 모든 동력(all of Intel’s horses and all of Intel’s men)이 다시 합쳐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스핌 Newspim] 이홍규 기자 (bernard0202@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