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핌=한기진 기자 ] 지난 1월 20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항공가족 신년인사회’. 1월 7일 취임한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원로와 선배들을 보면 먼저 다가가 인사를 청했다. 김수천 아시아나항공 사장, 성일환 항공진흥협회장(한국공항공사 사장),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을 보면 한발 앞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아버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동시대의 항공산업 선배들이다. 조정식(더불어민주당)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이 “사장 승진을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자, 그는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십시오”라고 머리를 숙였다. 190cm가 넘는 신장 덕에 유독 눈에 띄었다.
이날 신년인사회 도중 기자와 따로 만난 조원태 사장은 “선배님들이 이룬 것을 잘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땅콩 회항 등 한진가 3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의식해서인지 그는 몸을 낮추는 ‘겸손의 CEO’를 자청한다.
◆ 한진해운 와해 등 위기의 시기 ‘중책’ 맡아
몇 년 전만 해도 조양호 회장은 3남매가 한진그룹을 3분하는 그림을 구상했다. 조원태 사장은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과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은 호텔사업, 조현민 전무는 광고 및 진에어(저비용항공사) 등을 경영하는 구도였다.
2014년 12월 땅콩 회항 사건으로 조현아 전 부사장이 불명예 퇴진하면서 조원태 사장의 역할이 커졌다. 2015년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이듬해 1월에는 대한항공에서 정비, 운항, 객실, 호텔 등을 관할하는 총괄부사장을 맡았다. 조양호 회장은 후견인으로 지창훈 사장을 내세웠다. 지 사장은 조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항공업계 30년 관록의 전문가다.
지난 3년간은 조양호 회장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다. 한진그룹 창업자인 고(故) 조중훈 회장이 애지중지 키웠던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위원장을 맡아 대회 준비에 애정을 쏟아부었지만 권력 외풍에 중도 하차하고 국회 청문회에도 불려나가야 했다.
조 회장은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그룹의 어려움과 한진가의 복잡한 사정 등을 감안, 경영권 승계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결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조 사장이 지난해 총괄부사장 재직 시 보여준 성과를 보고 큰일을 맡겨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영업이익(1조1208억원)이 전년 대비 26% 증가하며 역대 최대였던 2010년(1조2357억원)에 육박하는 실적을 올렸다.
물론 지난해 1년 성과만 고려한 게 아니다. 입사 이후 보여준 성적표를 모두 반영했다. 2008년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와 신종플루 확산 등으로 전 세계 항공업계는 위기에 처했다. 당시 여객사업본부장이던 조 사장은 한국발 외국행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다. 대안으로 미국, 아시아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을 거쳐 목적지로 향하는 ‘환승 수요’ 유치에 나섰다. 그 덕에 2009년 전 세계 대부분의 대형 항공사가 적자를 기록했지만 대한항공은 1334억원의 흑자를 냈다. 이듬해엔 창사 이래 최초로 1조원을 넘는 영업이익을 올렸다.
불혹(40살)을 넘긴 조원태 사장의 나이도 고려됐다는 후문이다. 조양호 회장은 1992년 43세의 나이로 조중훈 회장 재임 때 대한항공 사장에 올랐다. 이후 10년간의 경영수업 끝에 2003년 54세에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조 회장이 40대 초반부터 대한항공을 이끈 경험을 토대로 조 사장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후문이다.
(왼쪽부터)릭 앤더슨(Rick Anderson) 보잉 동아시아담당 부사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새이커 섀럴(Chaker Chahrour) 보잉 글로벌세일즈&마켓팅담당 부사장이 2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보잉 찰스턴 센터에서 보잉 787-9 항공기 첫 인수 증서에 사인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대한항공> |
◆ 한진가 ‘장남’의 면모 보여줘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한진가의 어려움은 조 사장이 한진가 ‘장남’으로서 책임감과 겸손함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회가 됐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아버지가 공개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 조 사장은 달라졌다. 자동차 대신 사진촬영과 IT기기를 다루는 데 관심을 더 두고 외부 노출을 최대한 피하며 지내왔다. 어수선한 대한항공 분위기를 잡기 위해 2015년 초 소통위원회와 소통게시판을 만들어 임직원들과 호흡을 대폭 늘렸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임직원과 사업의 동반자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행보”라며 “임직원들과 스킨십을 늘리며 현장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전 한진그룹 오너들과 판박이”라고 말했다. 취임 일성으로도 '소통'을 가장 먼저 내세웠다.
◆ “원가절감이 생존전략”
큰 기대를 받으며 대한항공 CEO에 올랐지만 조 사장의 앞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 미국 달러 강세, 원화 약세, 유가 상승 등 3대 악재에도 실적 개선을 이뤄내야 한다. 대한항공은 달러/원 환율이 10원 상승할 때마다 영업이익이 180억원씩 줄어드는 구조다. 또 항공유가 배럴당 1달러만 올라도 수백달러 손실을 입는다. 조 사장도 이런 점이 고민이라고 연초 이후 몇 차례 만남에서 기자에게 털어놨다.
“환율은 외부 요인이라 우리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돈 많이 벌어서 부채비율을 낮추면 좋겠지만 생각대로 하기 어렵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유상증자다. 올해 매출이 작년보다 어려울 수 있다.”
대한항공의 지난해 말 부채비율은 1178%.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서 1000% 아래로 낮추는 게 급선무다. 비용을 줄이고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확보해야 가능하다.
조 사장은 밑그림을 그린 듯했다. 항공업계 밑바닥 경험을 토대로 수익성 개선을 위한 해결책을 밝혔다. “좋은 항공기를 장거리 노선에 투입해 매출이 확대되면 더 빨리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다. 이를 위해 보잉 787-9 항공기를 들여왔다. 연료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어 고유가 시대가 와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보잉 787 항공기 핵심부품 중 날개 끝 구조물인 레이키드 윙팁(Raked Wing Tip)을 제작하는 대항항공 부산테크센터 모습. <사진=대한항공> |
◆ 2025년 항공우주 매출 3조원, ‘조부의 제공호’ 실현 나서
조 사장에게 보잉 787-9은 단순히 수익성 개선에 적합한 최신 여객기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보잉 787-9에는 조 사장의 오랜 소망이 담겨 있다. 2013년 6월 프랑스 파리 에어쇼에서 당시 조원태 부사장은 레이코너 보잉 사장에게 747-8i를 11대 사줄 테니 대한항공이 제작에 더 많이 참여케 해달라고 요청했다. 보잉사는 대한항공의 기술력을 신뢰하지 못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조 사장의 끈질긴 노력은 성과를 맺었다.
보잉 787-9에 대한항공에서 제작한 부품들이 장착됐다. 보잉 787-9에는 대한항공 부산 테크센터에서 만든 날개 끝 곡선 구조물인 '레이키드 윙팁(Raked Wing Tip)'과 후방 동체, 날개 구조물인 '플랩 서포트 페어링(Flap Support Fairings)' 등 6가지 부품이 들어간다. 레이키드 윙팁은 공기저항을 감소시키는 필수 구조물로 대한항공이 디자인하고 보잉사가 이를 채택했다. 보잉 787-9 납품을 계기로 대한항공은 항공우주 부문에서 2025년 매출 3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조 사장의 이 같은 행보는 조부의 못다 한 꿈 ‘제공호’를 다시 날게 하기 위한 시도다. 제공호는 1982년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기로 고(故) 조중훈 회장이 국산 항공기 제작의 꿈을 담아 만든 미완의 역작이다.
조 사장은 아버지 조양호 회장의 큰 그림 속에 경영권 승계를 준비해 나가고 있다. 경영권을 확실히 승계받기 위해서는 경영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조 회장이 여전히 한진그룹은 물론 대한항공 회장도 겸하고 있어서다. 조 사장이 대한항공의 조정간을 계속 잡을지는 어떤 기상조건에서도 임직원과 주주, 협력사를 태우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비행하는 그의 능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뉴스핌 Newspim] 한기진 기자 (hkj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