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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A 칼럼] 내 이름은 '고수'

기사등록 : 2018-06-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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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홍승훈 증권부장 = #. 나는 고수다. 적어도 투자시장에선 그렇다. 국내외 기관에서 주식, 채권 등 수조원 펀드를 운용한 경험, 그러면서도 상당기간 상위 30% 이내의 꾸준한 수익률, 나이가 들어서도 해외주식과 부동산 등 대체투자 영역에 뛰어들어 거둔 성과 영향이리라.

나 역시 한때는 욕심을 내다 큰 손실로 고객들 돈을 크게 잃기도 했다. 하지만 큰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운용 스타일은 점차 안정화됐다. 항시 의문을 품었고 역발상을 즐겼다. 버려야할 건 과감히 버리고 아플수록 복기했다. 꿈보단 현실을 잊지 않았고, 더 멀리 보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그렇게 난 오래된 와인처럼 숙성됐고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고수가 됐다.

몸값도 꽤 높아졌다. 성과급을 더하면 국내에선 남부럽지 않은 연봉 수준이다. 투자에는 은퇴가 없으니 정신만 또렷하면 앞으로 20년도 너끈할 듯싶다. 젊고 똘똘한 후배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지만 길게 놓고 보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 고수를 알아본 걸까. 올해 초 비공식 루트로 제안을 받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자리다. 풍부한 운용 경험, 글로벌 시각, 일관된 투자철학, 조직 리더십. 여러 면에서 내가 적격자란다. 세계 3대 연기금의 기금운용 수장. 600조원 넘는 기금운용의 최종 결정권자. 전화 한통에 글로벌 유수의 금융회사 CEO들을 부를 수 있는 막강 권력. 혹할 만했다.

장수가 전쟁에서 이겨 나라를 구하듯 투자에서 이겨 국부를 늘릴 수 있는 전략가야말로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이가 아닌가. 1800만 국민이 매달 적게는 몇만원에서 수십만원씩 내서 쌓은 수백조원 기금을 내 오랜 경험과 재능을 살려 잘 운용해 국부를 늘린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있을까. 날 배신했던 과거 지인들 얼굴도 잠시 스쳐간다. 비공식 제안을 전후한 주변 지인들의 권유도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접었다. 항상 그래왔듯 어차피 정해두고 치러지는 공모과정에서 들러리가 되기 싫었다.

#. 반년후. 엊그제 결국 국민연금은 CIO 재공모를 결정했다. 16명에서 8명으로, 다시 3명으로 압축됐던 차기 CIO 후보군에 '적격자'가 없단다. 공모 초기 출중한 인재들이 많이 지원해줘 고맙다고 한 국민연금 이사장의 말은 석달여만에 돌변했다. 듣기로는 유력후보로 거론됐던 이의 능력과 인품, 평판이 상당히 괜찮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낙마했다. 세간에선 국적, 해외자산 등의 문제로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는데 진짜 이유는 아닐 것이다.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았던 탓이다. 때때로 필요한 정무적 감각, 정권 입맞에 맞는 의사결정을 하리란 신뢰가 부족했을 것이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 주주권 행사 지침) 시행이 임박해 있다.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갖고 있는 재벌 등 상장기업만 300여개. 1,2대주주로 올라서 있는 기업도 꽤 된다. 재벌개혁에 속도를 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무기가 생길 판에 코드 불일치 인사를 기금운용 수장에 앉히기 싫었을 것이다. 99년 기금운용본부 설립이래 정치가 개입하지 않았던 인사가 없었던 것도 팩트다.

#. 1년 공백인 국민연금 CIO 자리. 그 부재의 존재감은 언제 드러날까. 지금까진 운이 좋았다. 최근 1년여 큰 파동이 없었지만 파도가 치기 시작하면 다르다. 투자는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다. 선제적인 대응이 핵심이다. 글로벌 투자시장 변동성이 최근 확대되고 있다. 이제 첫발을 뗀 남북, 북미 관계회복, 미국 금리인상에 더해 트럼프발 통상 분쟁은 글로벌 무역전쟁으로 번질 조짐이 있다.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엔 무역전쟁보다 큰 악재는 없다. 당장 올 상반기 기금운용 수익률이 뒤쳐지기 시작했다. 인력 이탈이 이어지고 우수 인력 선발은 지체된다. 어느때보다 선장의 역할이 긴요한 시점이 왔다.

국민연금의 기금은 623조원. 4년뒤인 2022년 1000조원에 달한다. 기금의 40% 가량은 해외자산이 차지할 것이다. 30~40년 사회생활을 하며 매달 꼬박꼬박 넣어온 국민들에 배신감을 주지 않으려면 최고 전문가를 CIO에 앉혀야 한다. 정권 코드 찾아 헤맬 시간이 없다. 누구 말마따나 국민연금 기금이 잘못되면 이사장이나 CIO 옷벗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위태로와질 수 있다.

#.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자. 해외 MBA 나와 금융회사에서 몇년 일하면 받을 수 있는 연봉 수준, 국회, 감사원, 장관, 검찰이 부르면 곧장 달려가 고개 조아려야 하는 현실, 잘해서 2~3년하다 끝나면 마주치는 취업제한 3년, 디테일한 투자판단에 대해서도 지적질을 해대는 무식한 주변인들. 이런 것도 문제긴 하나 시간을 두고 개선해도 된다.

무엇보다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자산배분과 기금운용을 잘 할 수 있는 고수를 뽑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정치적 판단이나 코드 불일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흠집 찾기에 매달리는 것도 그만두자. 국민연금 CIO에게 정치적 판단, 정무적 감각이 얼마나 위험한 지는 이미 수차례 봐오지 않았나.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최고 전문가들이 피말리는 경쟁을 하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번 재공모가 부디 정치가 경제를 망치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지 않길 빈다. 그리 된다면 나 역시 몇번이라도 공모 들러리를 설 수 있다.

deerbear@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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