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해 미투운동에 이어 올해는 ‘폭로논쟁’으로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직장 내 갑질에 대한 작은 외침부터 정부를 상대로 한 정책고발까지 폭로의 양상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등 개인미디어 와 기술 발전으로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판도라의 뚜껑을 열 수 있는 '폭로사회'가 도래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바야흐로 꽃피우고 있는 폭로의 사회·심리적 함의를 뉴스핌이 들여다 봅니다.
[폭로의 심리학] 글싣는 순서
ⓛ 왜 폭로하는가
② 일상화된 '폭로'
③ 폭로의 변천사..기자회견서 유투브까지
④ 국민들은 어떻게 보는가1
⑤ 국민들은 어떻게 보는가2
⑥ 국민들은 어떻게 보는가3
⑦ 후폭풍..바람직한 문화 정착
⑧ 폭로 그 후의 삶
⑨ 취재기자 방담
[서울=뉴스핌] 김준희 기자 = #서울의 한 복지 재단에 근무하던 A씨는 직장 상사 B에 대한 정보를 이메일로 언론에 제보했다. 내용은 이랬다. “본부장 B씨의 횡포를 폭로한다. 나는 B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렸다. 부당해고다. 그는 그동안 폭언·폭행과 함께 과중한 업무를 떠맡겼다.”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내부고발이다. 실제로는 '갑질 제보' '개인 민원’에 가깝다. 일각에선 ‘을의 반란’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참지 않고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적 의미다.
폭로가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개인의 '갑질제보'에서 권력 심장부인 청와대에 몸담았던 행정관이 상관을 대상으로 폭로전을 펼친다. 행정고시를 패스한 5급 사무관이 기획재정부를 대상으로 "권력의 압력에 기재부가 굴복했다"면서 유튜브를 통해 폭로에 나서기도 한다.
한국사회는 과거에 비해 ‘폭로하기 쉬운’ 풍토에 살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민주주의가 정착하며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졌다. 속칭 ‘을의 폭로’는 계급과 나이로 서열을 정하던 권위주의 사회에서 수평적 사회로 진입하며 두드러진 양상이기도 하다. 디지털 환경의 유용성과 영향력도 쉬운 폭로가 가능해진 배경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더 이상 을(乙)로 살지 않겠다”
폭로의 소재로 '회장님 갑질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7일 직원 상습 폭행 혐의로 송명빈 마커그룹 대표가 두 번째 경찰 조사를 받고 나왔다. 직원들을 상대로 폭행과 엽기 행각을 벌인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은 구속돼 24일 첫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갑질’은 우리 사회를 달군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다. 근래 들어 갑질이 부쩍 증가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전문가들은 “을들의 태도가 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명 생활 속 민주주의 반응이다. 수십 년에 걸쳐 민주주의가 구현되며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 정도와 민감도가 높아졌다. 최근 일련의 폭로는 자신이 겪은 부당한 대우와 억울함을 알리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8일 “억울한 일이라면 예전이 더 많았을 것”이라며 “사회 변화로 개인들의 의식도 변하며 예전엔 참던 것들을 지금은 못 참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직장 내 갑질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성 소수자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궐기로 나타났다는 평이다.
더군다나 현재의 언론 환경에서 을들은 갑도 될 수 있다. 채널이 다양화되며 선택권은 정보를 쥔 자에게 넘어갔다. 언론 제보와 사실 검증 과정을 거쳐 세상에 알려지던 내부 기밀은 SNS, 유튜브 등 개인 매체를 통해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수원=뉴스핌] 최상수 기자 = 폭행, 마약 투약, 횡령 등 혐의를 받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1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남부경찰서에서 나와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송치되고 있다. 2018.11.16 kilroy023@newspim.com |
◆온라인 통한 ‘연대의 힘’... 동조효과 두드러져
변화는 두드러진다. 신문과 방송 등 기존 미디어는 더 이상 유일한 정보 권력이 아니다. 각종 1인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콘텐츠가 기성 매체를 통해 확산된다. 한때 한 사람의 울림으로 끝나던 폭로가 지금은 미디어를 잘만 이용하면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SNS 등 기술 발달은 폭로사회의 가속화 요인으로 꼽힌다. 온라인을 통해 타인의 폭로를 접한 이들의 동조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미투 운동’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종교계·정치권을 넘어 10대들의 스쿨미투로까지 번졌다. 폭로 수단은 대부분 트위터·페이스북 등 개인 매체였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폭로가 한 번 나오기 시작하면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상기하게 된다”며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만큼 동조심리와 모방심리, 군중심리까지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폭로’에 익숙해진 만큼 갑질이나 미투 사건을 알리고 맞서게 된 심리적 요인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댓글을 통한 즉각적인 피드백 등 ‘동조’는 온라인 세계를 활성화시키는 핵심 가치다.
[서울=뉴스핌] 이형석 기자 = 청와대의 KT&G의 사장 인사 개입과 적자국채 발행 압력 등을 주장하고 있는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이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힐스터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1.02 leehs@newspim.com |
◆디지털 세대 “불공정 사회 바꾸자”
인터넷과 1인 미디어의 발달은 폭로 수단을 다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대간 의식 격차도 벌려 놨다. 이 때문에 폭로사회를 읽는 키워드로 ‘세대 차이’를 지목하는 시각이 제기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은 지식을 아는 것보다 찾는 게 중요한 시기”라며 “10년 전엔 모르고 따랐던 지시를 지금 세대는 인터넷을 통해 부당한 근거들을 찾고 주변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관행대로 해오던 직장 내 중장년층과 불공정하다는 여기는 청년층이 충돌하며 ‘내부 고발’이 활발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유튜브로 청와대의 KT&G 사장 인사 개입 의혹과 국채 발행 압력을 주장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역시 이런 시각에서 폭로 대열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신 전 사무관은 지난 3일 자살 소동 전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에 남긴 유서에서 ‘내부고발을 인정해 주는 문화’ ‘정책결정과정을 공개하는 문화’를 요구했다. 내부 고발에 대한 결심이 불공정한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식과 현실의 괴리, 즉 문화지체현상이 최근 이어지는 폭로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임 교수는 “한 때는 수직적이었던 지식 권력이 수평적으로 바뀌며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이 통하지 않게 됐다”며 “최근 폭로들은 그런 사회문화적인 현상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어 발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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