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고홍주 기자 =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사건에서 실무자 역할을 한 판사들의 재판이 본격화됐다. 헌법재판소 파견 법관으로부터 헌재 내부 동향 등을 보고 받아 ‘윗선’에 전달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은 “상급자들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윤종섭 부장판사)는 27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상임위원과 이민걸·방창현·심상철 부장판사에 대한 1차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이 전 상임위원과 이 부장판사는 대체로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법리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전 상임위원 측은 “일부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인정한다”면서도 “법원행정처에서 법리를 정리한 걸 재판부에 전달한 것이 직권남용인지 단순 권고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상급자들의 지시를 받거나 법원행정처 실장 주재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이행하도록 지시한 부분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며 “단지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떠맡은 것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직권남용죄의 공범이 아니라 객체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yooksa@newspim.com |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던 이 부장판사 측 역시 “전부 무죄를 주장한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변호인은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과 관련해) 개별 재판부에 의견을 전달하는 게 재판 개입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은 겸허히 인정한다”면서도 “해당 재판부에게 검토 자료를 보겠느냐고 의사를 물은 뒤 승낙해서 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등 사법부 정책에 비판적인 소모임을 와해하려고 한 혐의에 대해서는 “대응방안 검토 문건 등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약화를 목적으로 이뤄졌다는 건 다 인정한다”면서도 “당시 소모임 중복가입금지가 예규였기 때문에 행정처 의사 결정에 기조실장으로서 동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외견상으로는 전문분야 연구회 중복가입금지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예규가 제정된 이래로 해소 조치를 실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며 “오히려 2016년에는 중복가입된 수를 모두 합산해 연구회에 가입한 법관 수가 증가한 것처럼 기획재정부에 보고해 관련 예산을 7억원에서 14억원으로 증액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통진당 지위확인 소송과 관련해 선고 이전에 행정처에 이를 보고한 방창현 부장판사와 사건 배당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심상철 부장판사는 일부 사실관계가 다르고 법리적으로도 다투겠다고 밝혔다.
앞서 서울중앙지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지난 3월 5일 이들을 일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상임위원은 헌재와의 관계에서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 헌재 내부 정보 및 동향을 수집하고, 서울남부지법이 사립학교 교직원의 연금 지급과 관련해 재직기간 산출의 근거가 되는 법조항에 대해 한정위헌 취지로 위헌심판제청을 하자 해당 재판부에 직권취소를 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이 부장판사와 함께 통진당 해산 후 소속 의원들이 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법원행정처가 수립한 판결 가이드라인을 서울행정법원과 광주지방법원에 전달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 등을 와해 시도하기도 했다.
이 부장판사는 기조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국민의당 소속 박선숙·김수민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자, 사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협조를 얻을 목적으로 서울서부지법 기획법관에게 주심판사의 향후 재판진행계획, 사건 유무죄에 대한 심증을 확인해 보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방 부장판사는 전주지법 부장판사로 일할 당시 통진당 행정소송과 관련해 행정처 심의관에게 선고 결과와 이유에 관한 심증을 알려주고, 주심판사와 합의 없이 판결문을 작성한 혐의로 기소됐다.
심 부장판사는 서울고등법원장 재직 당시 통진당 지위확인 소송 항소심 재판부 배당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에 대한 다음 공판준비기일은 내달 24일 열린다.
adelant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