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뉴스핌] 오영상 전문기자 =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내린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니클로, 데상트 등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있고, 여행사에는 일본 여행을 취소하겠다는 전화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 내 사정이 이러할진대 일본 쪽 분위기는 어떨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특히 이번 갈등으로 K-POP을 중심으로 한 3차 한류 붐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도 생겼다.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7월의 마지막 날 일본 내 한류의 중심지라는 신오쿠보(新大久保)를 찾았다.
신오쿠보 한류거리의 전경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JR 신오쿠보역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다리 밑을 지나 작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한류 거리가 시작된다. 거리에 들어서면 낯익은 한글 간판이 이곳이 한류 거리임을 실감케 한다. 이날은 유난히도 더웠다. 아침부터 수은주가 치솟으면서 12시 경에는 35도를 넘어서는 불볕더위였다.
하지만 불볕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한류 거리에는 걷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의 아이돌에 열광하고 한국 음식에 푹 빠져 있는 일본인들이었다. 한일 관계 악화에도 한류는 죽지 않았음을 몸소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신오쿠보 한류거리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한일 갈등 "신경 안써"...BTS·트와이스 "짱"
한류 거리에 처음 들어서서 만나게 되는 곳이 '한류백화점'이다. 방탄소년단(BTS), 트와이스, 세븐틴, 레드벨벳 등 K-POP 아이돌에서부터 이민호, 송중기 등 배우에 이르기까지 한류 스타들의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사방 벽면에는 이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있고 앨범, DVD, 펜던트, 열쇠고리, 티셔츠 등 수백여 종의 관련 굿즈(goods)가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한류백화점 매장에서 쇼핑 삼매경에 빠진 일본 여성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한국인 점원에게 최근 한일 갈등으로 인한 영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소 영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물었던 질문이 무색하리만큼 "손님은 여전히 많고, 매출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손님의 대부분은 10대~20대 젊은 일본 여성들이었지만, 아직 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어린 학생들과 40~50대 중년 여성 등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초등학생 딸과 함께 왔다는 40대 여성은 "나는 이민호, 딸은 BTS의 팬"이라며 사진과 앨범을 사러 왔다고 말했다.
나이를 묻는 말에 웃음으로 얼버무렸던 친구 사이라는 두 중년 여성들은 슈퍼주니어, 송중기, 워너원 등 족히 7~8개 팀의 한류 스타 방송 영상을 녹화한 DVD를 사재기하듯 쇼핑 바구니에 쓸어 담고 있었다.
최근의 한일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알고는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라며 "이런 일로 한국이나 한류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류백화점 입구부터 가득찬 손님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이러한 한류 스타들의 굿즈를 판매하는 곳이 한류 거리에만 한류백화점을 비롯해 한류플라자, 한류랜드 등 10여 곳이 성업 중에 있었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던 한류플라자 측에서도 최근 한일 관계가 영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의 한류 붐이 이전과 다른 점은 과거 중년 여성들이 주도했던 한류 소비층이 이제는 10~20대의 젊은 여성들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한류는 이미 일본 여성들 사이에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한류 스타의 상품을 파는 매장은 신오쿠보에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한국 식품점, 일본 손님이 90%
발길을 옮겨 한국 식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인 '서울시장'에 들렀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니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무슨 제품들을 파나 찬찬히 둘러보기가 힘들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김치, 깍두기 등과 같은 반찬부터 라면, 과자, 음료수에 소주, 막걸리까지 한국에서 파는 모든 식료품은 다 팔고 있었다. 한국 슈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품 표시가 일본어로 돼 있고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점 정도이다.
판매하랴 물건 진열하랴 종업원들도 얼마나 바쁜지 인터뷰 요청도 힘들 정도였다. "전에도 한국 슈퍼는 있었지만 손님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90% 가까이가 일본 사람"이라는 대답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김밥, 떡볶이, 반찬 등을 파는 즉석식품 코너에도 손님들이 장사진을 이뤘고, 한국과 똑같은 식으로 판매하고 있는 호떡 코너는 말 그대로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을 실감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서울시장 매장 내 계산을 위해 줄을 선 손님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기자의 앞에서 물건을 고르던 20대 일본인 여성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요즘 내 친구 누구는 한국 음식만 먹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회사원이라는 기무라 고(44세)씨는 '쟈쟈멘(일본에서는 짜장면을 쟈쟈멘(ジャージャー麺)이라고 부른다)'을 사러 왔다며, 인스턴트 짜장면을 두 종류나 구매했다. 그는 "요즘 일본에서 짜장면이 인기라 여러 종류가 판매되고 있지만, 한국의 짜장라면이 제일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류는 바야흐로 일본인의 식문화도 바꾸고 있는 중이다.
건너편에 있는 '총각네'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화장품을 판매하는 입구 쪽 매장을 지나 안쪽 식품 매장에 들어서자 시식을 권하는 종업원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고, 일본 주부들은 삼계탕이나 육개장 등을 시식하며 조리법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열성을 보였다. 종업원들은 태극기와 한국 이름이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제품에 대해 설명하며 한류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한류스타 상품을 파는 '한류플라자'와 한국식품판매점 '총각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핫도그 가게 앞 '장사진'...치킨집도 대기 줄
거리 곳곳은 물론 골목 안쪽에는 한국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다채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김밥, 떡볶이에서 치킨, 불닭발, 부대찌개, 한정식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들이 총망라돼 있다.
1층에는 아이돌 굿즈 판매점, 2층에는 한국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그 중 신오쿠보 한류거리의 최고 히트 상품이라는 핫도그 가게 앞에는 예외 없이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손님들은 갓 튀겨 나온 핫도그 하나씩을 입에 물고 치즈를 길게 늘어뜨리며 너나 할 것 없이 핫도그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날의 햇볕은 핫도그라도 튀겨버릴 만큼 뜨거웠지만 기다림마저도 행복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이 핫도그를 먹는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게 이른바 '인싸'들의 필수 코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핫도그집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바삭한 식감이 일품인 후라이드 치킨, 오븐에 구운 오븐구이 치킨 등 한국식 치킨도 최근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핫(Hot)하게 떠오르고 있는 인싸템의 하나이다.
신오쿠보에 한국 치킨을 먹으러 왔다는 여대생 두 명은 '남대문 치킨'이라는 가게로 들어섰다. 이 집은 1층에는 치킨집, 2층에서는 한정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 내 한국 음식의 위상을 직접 들어보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당시 부재중이었던 점장이 절대 인터뷰는 하지 말라고 했다며 끝내 거절했다.
직접 이야기를 듣진 못했지만, 매장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만으로도 한국 음식의 인기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정냉경열(政冷經熱)'이란 말이 있다. '정치는 냉각돼도 경제는 활발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최근의 한일 관계는 '정냉경냉(政冷經冷)'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 내 한류는 여전히 뜨겁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식지 않는 한류를 기반으로 한 한일 간의 민간 교류 열기가 차갑게 식어버린 정치와 경제를 다시 한 번 뜨겁게 달궈주길 기대해 본다.
핫도그집 앞에 서서 치즈핫도그를 먹고 있는 일본 소녀들 [사진=오영상 전문기자] |
goldendo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