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조재완 김신영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그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뚜렷했다.
◆ '軍쿠데타' '5·18 무력진압' 주동 꼬리표…과거 청산 논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겐 군부 쿠데타 주동세력이란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신군부세력의 군사반란 중심에 있었다. 당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이끌던 군 사조직 하나회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총장 등을 연행했다. 12·12 사태 이후 전 전 대통령이 군을 장악했고, 그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5·17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에 저항한 5·18 민주항쟁 무력진압 중심에도 노 전 대통령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1987년 민주정의당 총재를 지냈고 1년 뒤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직선제로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다.
노태우 대통령 제13대 대통령 취임선서 [사진=국가기록원] |
재임기간 군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5·18 민주항쟁 진실을 왜곡·은폐했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군사정권 과거 청산에 소극적이었고 5공청산(제5공화국 비리 청산)은 물론 5·18 민주항쟁 관련자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퇴임 후엔 12·12 군사반란 주동, 5·18 운동 강제진압 등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 아들 재현 씨가 2018년 광주 국립 5·18묘지를 찾아 사죄했다.
우민정책으로 불리는 '3S(Sports·Screen·Sex)정책'은 전임 정부에 이어 노태우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삼청교육대 보상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사회정화란 미명아래 자행된 삼청교육대의 인권유린은 신군부의 잔혹함을 상징한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삼청교육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실제 이뤄지진 않았다. 2002년 들어서야 삼청교육대의 위법성이 인정됐고 2004년부터 보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삼청교육대 피해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해야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 '첫 직선 대통령'…6·29 선언과 북방외교 성과
직선제 도입은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야당과 제야세력 사이에 간선제로 선출된 전 전 대통령을 향한 비판 여론이 확산하면서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졌다. 1987년 민주정의당 총재였던 그는 대선에 출마하며 직선제 도입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한다.
노 전 대통령은 6·29 선언문에 본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민정당 대선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에서 사퇴하겠다는 단서를 내걸었다. 당시 전 대통령 또한 이를 수용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직선제 개헌이 노 전 대통령의 결정이 아닌 전 전 대통령과의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져 평가가 엇갈리지만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 타협을 이뤘다는 시선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대표적인 성과로 '북방 외교 정책'이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의 외교 관계 확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취임 이후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주제로 '7·7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내놨으며 1990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으로 이어졌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고 적극적인 문화, 체육 교류에도 나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노 전 대통령이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확장하는 단초가 됐다.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과 수교를 맺었다. 1990년에는 소련과 수교를 맺었고, 1992년에는 직접 중국을 방문, 1949년 이후 단절된 관계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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