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뉴스핌 권지언 특파원] 세계 금융 시장의 뜨거운 감자였던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완화(QE) 정책이 드디어 발표됐다.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 QE로 유로화가 약세를 가속화하면서 글로벌 환율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는 경고음도 빠르게 고조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출처:AP/뉴시스] |
매월 500억유로 정도의 규모가 될 것이란 시장 예상을 넘어선 정책 발표에 유로화는 약세를 가속화하며 1.133달러까지 하락, 달러화 대비 11년래 최저치를 다시 썼다.
전문가들은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유로화 약세를 통한 경기 부양이 이번 정책 결정의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유로화 가치가 낮아지면 수출 증대와 물가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린지그룹 수석 애널리스트 피터 부크바는 "ECB가 이번 QE 발표로 은행대출이 직접적으로 확대될 것이라 생각하는지 의문"이라며 "유로화 추가 약세가 골자였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 잇따른 금리인하…'환율전쟁' 이미 시작
문제는 유럽을 필두로 덴마크와 캐나다, 스위스, 페루, 인도 등이 최근 잇따라 자국통화 약세를 기대하며 금리 인하에 나서면서 글로벌 환율 전쟁이 재점화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덴마크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인 크로네 급등을 막기 위해 예금금리를 마이너스 0.2%에서 마이너스 0.35%로 하향 조정했다. 지난 19일에 이어 사흘 만에 두 번째 금리 인하 조치다.
앞서 스위스는 ECB QE 발표로 인한 프랑화 상승을 예방하고자 지난주 3년 4개월 만에 환율하한제를 폐지하는 포석을 뒀다.
터키는 지난 20일 기준금리를 7.75%로 50bp 깜짝 인하했으며, 캐나다도 21일 동결 예상을 뒤집고 기준금리를 0.75%로 25bp 인하했다. 유가하락에 따른 인플레이션 하락 부담이 커지면서 2009년 4월 이후 처음으로 금리를 내린 것이다.
시장에서는 금리 인하 조치가 더 뒤따를 것으로 예상했으며, 그 중에서도 캐나다와 유럽의 금리인하 결정 이후 통화가치 하락세가 가속화된 호주가 이르면 내달 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달러 대비 호주달러 환율은 23일 장 개막과 함께 2009년 이후 처음으로 0.8달러가 붕괴되기도 했다.
개리 콘 골드만삭스 대표는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환율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며 "통화가치를 낮추는 것이 경기 부양을 위한 손쉬운 방법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금융주간지 배런스 역시 ECB 정책발표에 대한 전문가들의 반응을 소개하며 환율전쟁이 펼쳐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드비어그룹 투자전략가 탐 엘리엇은 배런스와의 인터뷰에서 ECB의 월 600억유로 규모 국채매입이 '글로벌 환율전쟁에 쓰일 전함'이라고 비유하며 "QE의 목적은 유로화 약세를 통해 수출과 물가를 끌어 올리자는 게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 '신(新) 환율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국제금융시장에서 환율전쟁이란 단어가 처음 생겨난 것은 지난 2010년이다. 당시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이 국가 간 통화가치 약세 유도 경쟁을 지적하며 환율전쟁이란 단어를 언급하면서 이슈가 됐다.
환율전쟁은 자국 수출경쟁력을 높이고자 외환당국이 인위적으로 개입하면서 국제무역 상대국은 상대적으로 궁핍해지는 '근린궁핍화정책'으로도 불린다.
다만 이번 ECB의 QE로 촉발될 새로운 환율전쟁에 대한 시각은 예전만큼은 심각하지 않은 모습이다.
투자전문 사이트인 시킹알파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최근 움직임은 환율전쟁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경쟁적 금리인하 정도에 그친다고 평가했다.
시킹알파는 이전의 환율전쟁의 경우 수출을 통해 상대국의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이었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금리 인하 움직임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제로섬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플라자합의가 도출됐던 1980년 초 환율전쟁이나 주요 7개국(G7) 회의에서 엔저 유도를 위한 역플라자 합의가 도출된 1995년 환율전쟁 때와 달리 이번에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합의가 도출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FT는 이번 환율전쟁이 다소 장기간 진행될 수는 있겠지만 시장 전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 같지는 않다고 평가했다.
[뉴스핌 Newspim] 권지언 기자 (kwonjiu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