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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중독자의 고백㊴]교도소 생활만 17년..'마약에 지배당한 삶'

기사등록 : 2019-06-2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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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접한 '본드'..중학교 올라가 더 많은 마약에 손 대
16살 첫 구속..이후 17년 동안 교도소 수감 '반복'
"이제 단약에 성공해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고 싶다"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마약 안전지대인가? 아닙니다. 마약 청정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증명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한 해 마약사범만 1만2000명, 많게는 1만6000명이 검거되고 있는 마약 오염국입니다. 최근 재벌가를 비롯해 연예인들의 마약투약 사실이 줄줄이 적발되면서 모방범죄도 우려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문제는 마약의 위험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독증상’이라는 추상적인 부작용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마약의 실상과 위험은 무엇일까? 뉴스핌은 마약중독자와 그 가족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직접 쓴 수기를 입수해 연중기획으로 보도합니다. 건강한 삶과 가정을 마약이 어떻게 파괴하는지, 마약정책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짚어봅니다. 

[서울=뉴스핌] 임성봉 윤혜원 기자 =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최영호(가명)씨는 훗날 자신이 마약 중독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마약에 찌들어버린 그는 현재 언어장애는 물론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

최 씨의 어릴 적은 불우했다. 인삼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경제적 어려움에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수시로 이사를 다녔고 부모님은 툭하면 어린 최 씨를 친척집에 맡겼다. 최 씨는 당시를 “친척들에게 매를 맞은 기억 밖에 없다”고 떠올렸다. 종아리가 터지도록 회초리를 맞은 날이면 “부모님한테 보내달라”며 울부짖고는 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부모님은 야채 장사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고 집안에는 웃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최 씨는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고 한글조차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최 씨의 학업을 신경써 줄 사람이 없다 보니 성적은 밑바닥을 맴돌았다. 어린 최 씨는 나름 공부를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친구들과의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최 씨는 비슷한 집안 사정을 안고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다. 공부보다는 불량스러운 일을 꾸미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친구들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최 씨에게 본드를 내밀었다. 최 씨는 그제서야 친구들이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이유, 이상한 냄새의 원인을 알았다.

고작 초등학교 6학년, 최 씨는 친구와 함께 본드를 불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통과 구토증세가 덮쳐왔다. 그럼에도 최 씨는 “처음에는 원래 그렇다”는 친구의 말에 훈련하듯 본드를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드를 부는 날은 점점 많아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안색이 좋지 않은 최 씨를 추궁했다. 어르고 달래는 어머니의 노력에도 최 씨는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곧 어머니는 최 씨가 본드를 불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최 씨는 더 다양한 약물에 손대게 된다. 장소는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친구들의 집이나 으슥한 골목 지하실이었다. 그런데 한 지하실에서 약물을 즐긴 뒤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경찰관들이 있었다. 약물에 취한 최 씨 일행을 발견한 지하실 주인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은 최 씨와 친구들은 경찰서로 인계돼 유치장에 갇혔다. 경찰서 분위기에 압도된 이들은 무서움에 유치장에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최 씨를 포함해 일부 친구들은 과거 약물 사용으로 붙잡혔다가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적 있었다. 결국 최 씨와 친구들은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불과 16살이었다.

검찰 /김학선 기자 yooksa@

없는 살림에 변호사를 만나러 다니던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노력으로 최 씨는 보석으로 석방됐다. 판사는 최 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최 씨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나이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최 씨는 여전히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들은 수시로 최 씨를 유혹했고 그것은 의지만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결국 최 씨는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집행유예 기간에 약물에 손을 댄 탓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한 번 부모님의 노력으로 항소한 끝에 징역형은 사회봉사명령 120시간으로 줄었다.

대신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보호관찰소에 신고하고 한 가구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약물 후유증으로 최 씨는 동료들과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자주 싸움을 일으켰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마약’ 생각뿐이었다. 결국 최 씨는 공장에서 쫓겨났다.

최 씨는 이후로도 약물에 빠져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가 마약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기간만 무려 17년이었다. 출소할 때면 반드시 단약에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평생을 고생만 한 부모님은 최 씨의 안중에도 없었다. 최 씨는 그저 자신의 쾌락만을 찾는 마약 중독자로 전락한 상태였다.

약물 중독이 심해질수록 최 씨의 성격 역시 변해갔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불평불만을 늘어놨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인 중 최 씨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 명씩 최 씨 곁을 떠나갔다. 외톨이가 된 최 씨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비참한 생활을 전전했다.

최 씨는 결국 한 재활센터를 스스로 찾아갔다. 이제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금단증상은 최 씨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스러웠고 지독했다. 이곳을 도망쳐 다시 마약을 하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때면 다른 회복자들은 “가족을 생각하라”며 최 씨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교도소를 밥 먹듯 들락거린 최 씨는 아버지의 환갑잔치도, 누나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어머니 역시 최 씨 생각에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최 씨는 이곳에서 남들처럼 평범한 직장에서 월급 받으며 사는 삶, 그 월급을 모아 부모님께 효도하며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

 ※ 마약에 중독됐을 경우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를 통해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으며 △국립부곡병원 △시립은평병원 △중독재활센터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imbong@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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